“최근 20년간 한국의 GDP(국내총생산) 성장만큼 코스피지수가 성장을 했다면 얼마가 되는지 아십니까? 6000이 넘습니다. (코스피지수가 2500대인 상황을) 저평가라고 부르기도 굉장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박유경 네덜란드 연기금 APG 신흥시장 주식 부문장(전무)
금융감독원과 국민연금공단, 한국거래소 주최로 12일 서울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에서 열린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열린 토론’에 참석한 기관 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 저평가)’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들은 기업 가치 제고를 위한 밸류업 프로그램과 맞물려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확대 ▲주주총회 내실화 ▲장기 투자 촉진 등을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첫번째줄 왼쪽 4번째)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첫번째줄 왼쪽 3번째)이 12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열린 토론회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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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증시의 부진은 지표로 드러난다. 박유경 APG 전무에 따르면 1993년부터 2023년까지 미국의 GDP가 4배 성장하는 동안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10배 뛰었다. 같은 기간 한국 GDP는 7배 성장했으나, 코스피지수는 3배 오르는 데 그쳤다. 또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신흥국지수에서 한국 주식 비중은 2004년 약 17%에서 현재 13%로 뒷걸음질 쳤다. 그사이 대만 주식과 인도 주식 비중이 각각 12%, 5%에서 19%로 커졌다.
박 전무는 한국 주식 저평가의 가장 큰 원인이 일반 주주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데 있다고 봤다. 그는 “한국은 전통 산업과 IT(정보기술)를 비롯한 신산업이 잘 어우러진 좋은 시장으로 이런 (낮은) 평가를 받을 시장이 아니다”라며 “문제는 한국 주식시장이 주주에 대한 기본 보호를 아무것도 안 해준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소한 이사회에 주주를 위한 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시하면 좋겠다”고 했다.
아마르 길 ACGA(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 사무총장도 영상을 통해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 출범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단계로 보이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길 사무총장은 “이사회가 주주를 대신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국회의 상법 개정안이 이사의 충실의무가 본질에 부합하는 데 중요한 단계일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는 뜨거운 감자다. 현재 상법 제382조의 3은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이사가 충실의무를 수행해야 할 대상으로 주주를 추가해 보호 의무를 지우자는 게 핵심이다. 다만 재계에선 이사가 회사와 주주 사이에서 이해 충돌 상황에 놓일 수 있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러스트=챗GPT 달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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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주주총회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동섭 국민연금공단 수탁자책임실장은 “미국은 임원 보상을 주주총회에서 직접 승인받는 구조인데, 한국은 보수 한도를 승인받고 있다”며 “임원 보수 한도를 왜 그렇게 정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어 회사가 알아서 정하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했다. 그러면서 “기업이 밸류업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데 경영진 보상과 연계해야 한다”고 했다. 계획대로 기업 가치가 개선되면 임원이 보상을 많이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적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또 기관이 책임있는 의결권 행사를 하려면 매년 3월에 몰려있는 주주총회 일정도 분산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매년 3월 마지막 주에 200개가 넘는 기업의 주주총회 안건을 분석하고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기업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시간이 현실적으로 몇분밖에 되질 않는다”고 했다.
이왕겸 미래에셋자산운용 책임투자전략센터장 역시 “기관 투자자가 의결권을 충실히 행사하는데 주주총회 분산 개최는 핵심적인 부분”이라며 “어려운 점을 잘 알지만, (정책 당국이) 개선 방안을 검토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국내 증시를 뒷받침할 장기 투자 자금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 외에도 퇴직연금 등을 자본시장으로 불러올 세제 혜택을 마련해야 시장이 성장할 수 있다는 취지다.
박철우 신한금융지주 IR파트장은 “잘 알고 지내는 해외 기관투자자들은 ‘한국 시장에서 국민연금을 제외하면 장기 투자하는 자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며 “그러다 보니까 코스피지수가 단기 수급이나 이벤트에 변동성이 커지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이어 “국내 퇴직연금 자금이 매년 15%씩 늘어나고 있지만, 90%가 원금보장 상품에 몰려 있다”며 “이 자금이 국내 주식시장에 유입될 수 있는 파격적 세제 혜택이 필요하다”고 했다.
허욱 금융투자협회 부장도 “국민연금이 국내주식 투자 비중을 어느 정도 유지만 해줘도 밸류업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국내주식 주가가 오른다면 국민연금 기금 수익률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연기금 출자를 받아 굴리는 사모펀드(PEF)운용사가 밸류업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달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PEF운용사협의회 회장사인 프랙시스캐피탈의 라민상 대표는 “상장에 투자할 경우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를 위해 주가가 중요한 만큼 적극적으로 기업 주가 관리에 나서고 있다”며 “더 활발한 활동을 위해 기관 전용 PEF에 투자할 수 있는 기관의 조건을 확대하고, 일정 자격을 갖춘 개인 전문 투자자도 간접적으로라도 참여할 방안을 모색해달라”고 했다.
금융감독원은 이날 토론에서 나온 내용을 정책에 반영하고, 필요한 경우 소관 부처에 전달하겠다고 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지금 행정부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공감대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권오은 기자(oheu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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