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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한주를 여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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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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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버스에서 내리지 못한 사람

이 버스에서 내리면 다 끝난다

고인을 태운 운구차가 흔들리는데

큰 울음 삼키며 슬픔을 참는 사람들과,

곡소리마다 펄럭이던 버스 안 커튼들

겹쳐진 파노라마 너머로 두둥실

그리운 얼굴들이 재생된다

한평생 울퉁불퉁 곡선을 내달렸던 생애가

이렇게 쉽게 떠밀려가나

막내아들 말썽도, 어린 손주들 투정도 온몸으로 싣고

비포장도로 같은 생애를 버텼다던 할아버지

나는 더는 어둠이 싫어

곱게 모은 커튼을 다시금 묶어주었다

창 너머로 비스듬히 스며드는 따스한 그림자도, 결국은 팔

내달릴수록 길어지는 팔은 모두를 감싸 안을 수 없다

제아무리 긴 도로를 품었다 한들

살아생전 할아버지 품만큼 포근할까

너무 많은 자식들을 안아주느라 야위었던 그 팔뚝은

얼마나 많은 수혈을 견뎌왔었나

이제 평생에 한 번 안을 수도

붙잡을 수도 없게 된 그 팔뚝

세상 하나뿐인 할아버지의 온기가

비스듬한 햇빛을 받고 가계도 너머로 전해지는 듯했다

묶었던 커튼의 머리칼을 풀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이 버스에서 한 사람만 빼고 내려야 한다

내려야 한다고 한다.

서산시인협회, 「아라메詩」, 도서출판 시아북, 2022.

영구차를 타본 적도 있었고, 도로를 달려가는 영구차를 보기도 했었다. 영구차에 실려 있는 스승 구상 선생님의 관을 경기도 안성의 천주교 공원묘지까지 운구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장인과 장모, 그리고 내 대학 시절의 친구 박형희 군…. 화장터를 거쳐 장지까지 가기도 했었고, 곧바로 장지로 가기도 했었다.

시인은 운구차를 타고 장지로 가면서 할아버지의 팔과 팔뚝을 계속 생각한다. 팔을 뻗어 가족을 지켰고, 팔뚝을 내밀어 힘든 일을 했다. 할아버지의 팔은 튼튼한 근육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야위어 갔다. 너무 많은 자식을 안아주느라 야위어 간 것인데, 나중에는 수혈받으며 생긴 바늘 자국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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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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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생을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영구차에 빗댄 것이 절묘하다. 커튼을 묶어 차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게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어둠이 내린 세계는 죽음의 세계이고, 햇빛이 밝은 세계는 이승일 터이다.

버스에서 마지막에 내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관 속의 할아버지일까, 운전기사일까, 시적 화자일까. '마지막 버스에서 내리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할아버지일 것이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할아버지의 관을 사람들이 끄집어 내려야 한다. 우리 중 장례의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촌각을 아끼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데, 이 모양으로 살고 있으니….

이승하 시인 | 더스쿠프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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