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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26세의 일본 청년은 왜 히로히토 황태자를 총으로 쏘았을까? [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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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79

●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정치인을 노린 총격 사건 현장 사진을 한 장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일본 제국의 황태자인 히로히토를 노린 총격 사건이 벌어졌는데 현장 사진을 뒤늦게 신문에 게재하면서 사건의 개요를 상사하게 설명하는 기사입니다.

동아일보

혼잡 또 혼잡 = 사건 당일 호지문 앞. 1924년 9월 16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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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궁(攝政宮)은 일본 제국에서 섭정이 거주하는 궁전을 의미합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섭정궁 전하”는 일본 제국의 섭정인 히로히토 천황(일본 제국의 124대 천황)을 가리킵니다. 건강이 나쁜 부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1921년에서 1926년까지 섭정(攝政)을 하였습니다. 1926년 12월 25일 지병 악화로 다이쇼 천황이 죽은 후 히로히토 황태자가 천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히로히토가 정식 천황이 되기 전 (육혈포) 총격으로 사망할 수도 있었던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1924년 9월 16일 동아일보 기사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호문 대역사건(虎門大逆事件)

오는 10월 1일에 공판 시작, 범인은 대의사 아들 탄파대조

작년 12월 27일 오전 10시 45분에 섭정궁(攝政宮) 전하께서 제국의회 개원식에 행차하시는 중, 호지문(虎之門) 부근에서 전하의 자동차를 향해 육혈포를 발사한 자가 있었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고, 그 사건은 황실(皇室)에 대한 위해죄(危害罪)로, 형사소송법 제 310조 2항에 따라 대심원의 특별 권한에 속하는 사건이 되었다. 검사총장이 그 수사의 임무를 맡아 사건을 조사한 결과, 범인은 산구현(山口縣) 웅모군(熊毛郡) 주방촌(周防村) 출신이며 전직 대의사였던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넷째 아들인 대조(大助, 26세)로 밝혀졌다. 사건은 10월 1일에 공판에 부쳐졌다. 재판장은 횡전국신(橫田國臣) 씨이며, 배석판사는 풍도직통(豊島直通), 극행차랑(磯谷幸次郎), 송강의신(松岡義信), 서천일남(西川一男) 씨 등이다. 검사는 소산송길(小山松吉) 씨이고, 변호인은 화정탁장(花井卓藏), 암전주조(岩田宙造), 금촌력삼랑(今村力三郎) 씨 등이다.

또한, 황실에 대한 위해죄는 형법 제 73조에 규정되어 있으며, 이 법에 따르면 천황, 태황, 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또는 황태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번 사건은 대심원의 특별 권한에 속하는 만큼 1심에서 확정되며, 공소나 상고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건 발생 전후의 상황

범인은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되었다. 12월 27일 오전 10시 40분, 섭정궁 전하께서 의회 개원식에 행차하시던 중 호지문 부근에서 전하가 탄 자동차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 자가 있었다. 범인은 즉시 포박되었으며, 전하께서는 다행히 무사하셨다. 사건 당시 전하의 자동차가 지구금평정(芝區琴平町) 1번지에 도달했을 때, 호지문 공원과 교구신조(橋口新助) 씨의 집 사이 거리에서 연령이 25~26세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권총을 발사했다. 발사와 동시에 큰 소동이 일어났으며, 경찰들이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고 경시청으로 호송했다.

▽철야 수색

사건이 발생하자 검사국에서는 검사총장과 각 판검사가 출동했고, 경시청 전 부서가 총출동하여 현장을 조사했다. 현장에서 총을 압수하고 범인을 엄중하게 취조한 결과, 범인은 산구현 웅모군 주방촌 출신이며, 전직 대의사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넷째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날 밤, 경찰들은 추가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철야 수색을 진행했으나, 별다른 연루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예언(豫言)의 서신

이번 사건의 범인 탄파대조(灘波大助)는 사건 발생 전, 형 정태랑(正太郞)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사회를 전율하게 할 대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내용은 자기는 세상에서 버림받을 일서생이나 이번에 사랑에 지나는 힘으로 사회가 전율할 만한 대사건을 단행할 터이니 주목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그 편지는 12월 27일 오후 2시에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으며, 범인은 이번 사건을 계획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이 드러났다.

▽범인의 가족

범인은 전직 대의사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다섯째 아들이며, 부모가 다 있고 고향에서는 다소 명망이 있는 집이었고 그의 형들은 모두 실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과거에 정치계에 몸담았으나, 이번 사건으로 인해 대의사직을 내려놓고 근신 중이다. 그 고향에서는 촌장까지 나서서 전촌이 근신하는 분위기라고 전해진다.

▽학력은 어떠한가

범인 탄파대조는 산구현 웅모군 주방촌 출신으로, 덕산(德山)중학교에서 4년급까지 마치고 산구(山口)에 있는 흥성(鴻城)중학교에 입학하여 2학기까지 다녔다. 이후 여러 번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진 뒤, 동경으로 올라와 조도(早稻田) 고등학원에 다니며, 중학교 시절부터 정치와 시사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동경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했고, 메이데이 시위에도 선두에서 참가했다. 동경에는 작년 9월 1일 대지진이 일어나던 날 정오경 자기 고향으로부터 도착한 것이라는데 그는 애탕(愛宕)경찰서 령목(鈴木)경부보에게 체포되였다더라.

▽내각 총사직

범인이 잡힌 이후로 일본 상하는 모두 경동하여 당시 산본(山本)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직을 하고 산리(山梨) 경비 사령관과 탕천(湯淺) 경시 총감은 즉시 후등(後藤) 내무 대신에게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그때 백상(白上) 관방 주사(官房主事), 정력(正力) 경무부와 소활 경찰서까지 경시 총감에게 사표를 제출하였고 호등 내무 대신은 즉시 근신하는 뜻을 보였으나 적화 방지(赤化防止) 단원이 후등 내무 대신 집에 뛰어드는 등 대소동이 있었더라 (동경 전보).


● 사건의 요약

1923년 12월 27일 발생한 일본의 사건으로,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려던 히로히토 황세자를 겨냥해 권총이 발사되었는데 범인은 의사의 다섯째 아들인 26세의 탄파 대조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사건 직후 체포되었고 철야 수사 결과 추가 용의자는 없는 단독 범행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대조는 사건 전 자신의 형에게 ‘내가 큰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한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총을 쏜 이유는 명확하게 취재되지는 않았지만 청년이 평소에 노동운동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는 정황만 있을 뿐입니다. 사건으로 인해 당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국민들이 크게 동요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공판은 이 기사가 나간 후 보름 후인 1924년 10월 1일이 시작된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10월 1일에 시작된 재판의 결과는 한 달 보름 만인 1924년 11월 13일 끝이 납니다. 사형이 집행되었으리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기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일본대역범 사형(日本大逆犯死刑)

긴 시일을 두고 심리 중에 있던 호지문(虎之門)사건의 범인 탄파대조(灘波大助)에 대한판결언도는 마참내 작 십삼일 횡전(橫田)대심원장 소산(小山) 검사총장의 담임으로 대심원내 특별 법정에서 열리었는데 방청석은 물론 입추의 여지없이 만원이었고 그 외에도 사십 여명의 판검사가 립회하여 장내의 공기는 말할 수 없이 긴장되었다. 정각 오전 10시 27분 횡전 재판장은 정엄한 어조로 판결 이유서를 낭독한 후 바로 언도에 들어가 “피고 탄파대조를 사형에 처한다”는 무거운 소리가 떨어지자 탄파대조는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높이 들고 법정이 떠나갈 듯이 무엇이라고 크게 부르짖은 후 청동(靑銅)같은 얼굴빛으로 법정을 나왔다는데 특별한 사정이 없기 전에는 일 주간 이내로 사형을 집행하리라고 하더라. (동경 전)

게재지 동아일보
게재일 1924-11-14


● 트럼프 총격 사진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최근에 미국 트럼프 후보가 괴한이 쏜 총탄에 스쳐 맞는 순간을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그 사진에 비해 100년 전 일본 황태자의 피격 사진은 총격 현장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흐릿한 흑백사진이기 때문이거나 순간 포착을 할 수 있는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트럼프의 사진은 주인공이 주변의 인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극적인 표현이 가능했습니다. 그건 미국의 정치 현장이 ‘무대’와 ‘관객’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촬영하기 좋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인 기자회견이나 연설, 정치적 의사 결정을 보여주는 장면은 일반적으로 무대 위에서 이뤄지며, 사진 기자들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멀리서 망원렌즈를 준비하거나 가까이서 광각렌즈를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사진기자와 중요 인물 사이에는 카메라를 가릴 만한 요소가 없습니다. 그게 정치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해 두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완벽한 촬영 조건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순간이 희극이건 비극이건 제대로 카메라에 포착되어 역사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구요. 오늘은 100년 전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현장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눈에 띄시던가요?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세요. 참, 지난주 백년 사진에서 제가 보름달 아래에 있는 식물을 수수라고 표현했는데 수수가 아니라 갈대 또는 억새라는 댓글 의견이 있었습니다. 독자분들의 해석이 맞는 것 같아 정정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다른 사진으로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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