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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잔소리 공화국의 엇박자 [뉴노멀-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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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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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화 | 연쇄창업가



추석 연휴 귀경 차량들이 ‘논두렁 감옥’에 갇혀 극심한 정체를 겪었다는 ‘웃픈’ 소식이 화제다.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우회로를 택했을 뿐인데,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한 농로로 차량이 갑자기 몰려들어 오도 가도 못하고 몇 시간이나 갇혀 버린 딱한 상황. 편안한 귀가를 앞두고 난데없이 ‘감옥 체험’을 하게 된 이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보내지만,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습관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한 해프닝이었다.



매우 친절하고 디테일에 충실한 한국의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다 보면 그 꼼꼼함에 탄복을 금치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가끔은 미국에서 쓰던 구글 내비게이션의 차분하고 절제된 안내가 그립기도 하다. 수시로 단속 카메라가 등장하는 도로 상황에, 그때마다 일일이 그것도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경고해주는 안내 음성까지 더해지면 느긋하게 음악을 감상하며 운전하는 여유는 먼 나라 얘기가 돼 버린다. 고성능 음향장치며, 특제 흡음·방음 장치에 이르기까지 고가의 옵션을 채택하는 데 거리낌 없는 한국의 운전자들이 정작 소음 발생기를 차량 내부에 모셔두는 역설.



내비게이션은 꺼 놓을 수라도 있지만 벽체에 내장된 스피커에서 울려대는 아파트 관리실의 안내방송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사생활의 최후 보루인 가정에까지 침투한 공식적 잔소리는 밤새 울다 지쳐 뒤늦게 잠이 든 아기를 깨우고, 원격으로 참여하던 회의에 불쑥 끼어들기 일쑤다. 대부분은 알아두면 필요한 정보이긴 하지만, 또 상당수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잔소리들이다. 추석 연휴 쓰레기 분리배출 같은 공지사항이야 문자메시지나 승강기 공지 등을 이용하면 될 것이고, 층간 소음 등 공공질서 관련 사항은 당사자들과 관리실이 해결할 일이다. 이쯤 되면 누군가 정작 해야 할 일을 잘하는 대신 잔소리로 책임을 갈음하려 한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세상이 됐지만 그럼에도, 때로는 그래서 더 고객센터에 직접 전화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수화기, 아니 무선 중계기 저편에서 진짜 사람의 육성을 듣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어찌 된 일인지 점점 길어지는 추세다. 그 시간의 대부분은 잔소리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상담 직원의 감정노동이 법적으로 보호받게 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평생 남에게 큰소리 낸 적 없고 그저 곤란한 상황을 신속하게 해결하고 싶어 전화를 걸었을 뿐인 대다수 사람들까지 산업안전보건법의 몇 조 몇 항 운운을 들어야 하는 건 사회적 낭비다. 법률까지 제정했으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차단하고 그래도 문제가 되면 법적 조치를 취하면 되는 일 아닐까.



어딜 가나 장황한 안내방송에 눈을 돌리면 이래라저래라 안내를 가장한 경고 문구투성이다. 질서유지로 악명이 높은 싱가포르도 이 정도는 아니다. 처벌이 엄할 뿐이다. 대다수 사람들을 범법자나 어린애 취급하는 각종 단속 카메라와 금지 문구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듯하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억제해 아무런 경고도 없는 상황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경쟁하듯 또 금지와 경고가 늘어난다. 이른바 사각지대가 없어질 때까지 규제 숨바꼭질이 계속되는 형국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확고한 치안과 공공질서는 어쩌면 중앙집중적으로 기획과 통제가 가능했던 산업화 시대의 산물일지 모른다. 이제까지의 보모국가 모델이 앞으로도 문제없이 작동할까? 발전하는 기술마저 책임 회피 수단으로 만드는 규제 숨바꼭질과 첨단화된 잔소리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정치적으로는 깨어 있는 시민의식을 엄청 강조하면서, 일상의 시민의식은 이토록 경시하는 현란한 엇박자, 거기에 어쩌면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수많은 힌트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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