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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한국엔 대재앙 ‘트럼프식 위기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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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지난 7일 미국 위스콘신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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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라는 개인이 당선되든 낙선되든 간에, 트럼프주의의 주요 정책 방침들은 그 강도는 조절되더라도 아마도 앞으로 미국의 국가 정책에 어느 정도 반영될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미국이 주도하는 보호주의는 앞으로 세계체제의 ‘뉴 노멀’, 즉 새로운 표준이 될 가능성이 크고, 중국과의 경쟁은 앞으로 미국의 장기적인 핵심적 국가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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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자주 가는 곳은 아니지만, 반년 전에 학술회의 참가 건으로 미국의 시애틀을 찾았다. 15년 만에 다시 찾은 시애틀은 나에게 충격을 안겼다. 우선, 시내에서 노숙자들이 보이지 않는 길거리는 거의 없었다. 시애틀을 포함한 미국 대도시는 대부분 노숙자 인구가 상당하지만, 시애틀의 경우 지난 15년간 그 인구가 늘어난 것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부유한 동네에서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이른바 ‘게이티드 커뮤니티’들이 많았고, 시내 거리에서는 각종 범죄들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채 일주일도 안 되는 체류 기간 내가 직접 본 슈퍼 절도는 두 건이었다. 슈퍼 직원들은 좀도둑질을 아예 방관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노숙이나 슈퍼 도둑질은 그야말로 약자 중의 약자인 최하층의 문제였지만, 중간층의 삶 역시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동료 대학 교원들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미국 대학 교원들의 7할이 비정규직이라는데, 이건 한국(56%)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이때 나는 바다 건너에서 깊어지는 위기를 겪고 있는 사회를 보고 온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 인상을 분석적으로 바라보면, 미국 위기의 핵심은 바로 1970년대 후반이나 1980년대 초반에 이윤 저하와 인플레, 성장률 둔화의 해법으로 주목받았던 신자유주의라는 미국식 자본주의 운영 방식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2008년에 위기를 맞았는데, 그때의 상황은 공적 자금의 투여로 마무리되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기본적 궤도 수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중의 하나는 노임 억제다. 미국의 경우 인플레를 고려해 계산된 노동자들의 평균 실질 임금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다. 특히 반숙련이나 저숙련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사실상 하향곡선을 그려왔고 이는 미국 중산층의 지속적인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50년 전에 전체 가구의 무려 61%가 중산층으로 분류됐던 나라에서 이제 중산층은 51% 정도다. 그 대신에 늘어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노숙자로 대표되는 최하층과 영양 섭취도 제대로 못 하는 하층이다. 2000년에 10% 정도 됐던 식량 불안정 가구, 즉 필요한 음식을 늘 먹을 수 있는 보장이 없어 언제나 굶을 수 있는 가구는 이제 전체의 14%나 된다. 가면 갈수록 가난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한국과 달리 수출이 아닌 내수가 주도하는 미국 경제의 기반, 즉 국내 소비의 지속적 증가를 보장하기는 어렵다. 소비가 증가해도 그만큼 가계부채도 늘어나 차후 이자 및 부채 상환 부담이 커진다. 한마디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성장의 엔진은 고장 난 것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임금 억제 이외에 공업의 해외 이전, 저임금 외국으로의 외주화 같은 탈공업화를 통해 이윤율의 증가를 노려왔다. 한데 장기적으로는 이 전략 역시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았다. 탈공업화된 사회에서는 최첨단 기술 발전이 어려워지고, 최첨단 기술 발전이 경쟁국에 비해 더디면 결국 그때까지의 세계 패권을 내려놓아야 되기 때문이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에 의하면 지금 핵심 최첨단 기술 중에서 미국이 선두를 달리는 기술들은 10%에 불과하고, 중국이 이미 선도하고 있는 것은 90%나 된다. 이윤을 위한 해외로의 공업 이전은 결국 패권 위기로 이어지고, 기존의 미국식 패권 유지 전략은 그 위기를 더 부추긴다. 지금 세계의 모든 대륙, 약 80개국에서 17만명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은 군사력의 과도 확장(overextension)의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그런 사이에 미국의 군사 지출을 뒷받침해주는 미국 국채의 연간 이자는 올해 8920억달러에서 10년 뒤 1조7000억달러 이상으로 두 배나 늘어날 예상이다. 국채 이자 비용이 군비를 능가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세계 제국의 유지는 사실 장기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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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트럼프의 각종 범죄 기록과 범죄 의혹, 그 비상식적인 언행 등이 세인들을 계속 경악하게 해왔지만, 사실 트럼프주의란 결국 미 제국이 지금 장기적으로 맞고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한 하나의 극우적 해법 제안으로 보인다. 이 해법의 핵심은 첫째, 일부 약자 집단에 대한 잔혹한 배제를 통한 신자유주의의 모순들에 대한 봉합이다. 즉, 트럼프 말대로 수백만명의 미등록 이민자들을 강제 퇴거시키고 합법적 이민의 규모를 축소함으로써 그는 신자유주의적 노동 정책을 유지한 채로 노동 시장에서 기존 노동자들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그 임금인상 폭을 높이려 한다. 둘째, 트럼프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의 국가 정책이었던 보호주의로 회귀하려 하고, 재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려 한다. 셋째, 트럼프는 동유럽 등 ‘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하위 파트너들을 포기하여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국을 상대로 한 경쟁에 올인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장기적 국내 소비력과 기술 경쟁, 그리고 제국의 과도 확장의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다.



미 대선의 결과는 당연히 미지수다. 이미 두 번의 암살 시도를 당해본 트럼프가 대선 이전에 무대에서 사라져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위기 속 미국에서 벌어지는 정치 경쟁의 과열은 이미 ‘정상’을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다. 한데 트럼프라는 개인이 당선되든 낙선되든 혹은 암살을 당해서 죽든 간에, 위에서 요약한 트럼프주의의 주요 정책 방침들은, 그 강도는 어느 정도 조절되더라도 아마도 앞으로 미국의 국가 정책에 어느 정도 반영될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미국이 주도하는 보호주의는 앞으로 세계체제의 ‘뉴 노멀’, 즉 새로운 표준이 될 가능성이 크고, 중국과의 경쟁은 앞으로 미국의 장기적인 핵심적 국가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 경쟁에서 밀리면 밀릴수록 오히려 더 무리하게 ‘중국 견제’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여전히 무역에 의존하고 여전히 중국을 최대 무역 상대국으로 두고 있는 한국에 미국의 장기적 보호주의 및 반중국 경향은 큰 재앙이다. 미국의 안보 ‘우산’도 벗어날 수 없지만, 중국과의 협업 없이는 한국의 경제적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한국의 핵심적 국익을 해칠 수밖에 없는 위기 속 미 제국의 이 경향에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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