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7 (금)

위험한 액체에 뇌가 녹았다…'괴기한 죽음'이 바꾼 의사의 삶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인터뷰]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가장자리 노동자 치료와 환경 개선에 '헌신'
36년간 노동자 의료 지원하고 실태 조사하며, 법·제도 바꿔 와
"힘든 사람 도와주는 게 공동체 복원, 지역 주민들과 건강과 돌봄 공동체 만들고 싶어"

머니투데이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 의대생 때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일하다 숨지거나 장애를 갖게된 피해자들을 마주한 뒤, 이후 36년의 삶이 바뀌었다. 노동자들을 치료하고, 조사하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환경을 만들까 연구하고. 그날 이후 한 번도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단다./사진=남형도 기자


의대생이 처음 마주하는 광경이었다. 수업 때 설명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맨 처음엔 굉장히 무서웠단다. 환자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괴기한 소리를 질렀어요. 뇌가 많이 망가져 있었고요. 좀 겁난단 생각을 했었지요."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이 36년 전을 회상했다. 때는 1988년. 당시 한양대 의과대학에 다니던 그를 두렵게 한 환자들. 구리시 원진레이온이란 큰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었다.

머니투데이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는 광경. 무색무취의 이황화탄소가 그리 많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앗아갔다./사진=남형도 기자(녹색병원에서 촬영)


그들은 옷을 만드는 섬유인 '레이온 실'을 만들었다. 이를 위해 이황화탄소란 유기용제로 원료를 녹여야 했다. 색도 냄새도 없었던 위험한 액체.

커다란 공장 공기에 이황화탄소가 섞였다. 노동자의 들숨에 파고들었다. 폐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몸속에서 뇌와 신경세포를 녹였다. 노동자는 말이 어눌해지고 손발이 멎었다.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게 됐다. 지금까지 3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300명이 넘는.

머니투데이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들이 집회하는 광경./사진=남형도 기자(녹색병원에서 촬영)


의대생이었던 임상혁은 조사하고 목격했다. 이들의 가정이 한순간에 깨지고 나아가 숨지는 것을. 직업병을 인정받으려 싸우는 것을. 대책 없이 닫힌 공장문을 보며 또 싸우는 것을. 곁에서 플래카드를 만들며 연대했다. 이어 맘먹었다.

"어렵고 힘든 분들을 보면서 '내가 의사로서 이걸 좀 해야 되겠구나'. 그게 가장 큰 동기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나서 한 번도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지요."


원장실은 지하 2층에, 노동자 재활실은 가장 높은 곳에

머니투데이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을 얻은 피해자들. 녹색병원은 그 비극 위에서 세워졌다./사진=남형도 기자(녹색병원에서 촬영)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밥벌이를 위해 가족과 삶을 어깨에 이고, 평범하게 출근한 이들이 스러져 퇴근하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비극 위에서 놀라운 병원과 연구소가 세워졌다. 원진레이온에서 직업병을 얻은 피해자들이 만든 거였다. 그게 1999년 6월 5일이었다. 경기도 구리에 처음 생겼던 원진녹색병원과 노동환경건강보건연구소 얘기다.

머니투데이

2003년엔 서울 중랑구에 녹색병원이 문을 열었다. 450여 명의 의료진과 300병상 규모 종합병원. 녹색병원. 인권침해나 농성으로 건강을 잃은 이들을 치료하는 곳. 가장자리 노동자들이 아파서 일터를 떠나지 않도록 의료비를 지원하는 병원. 노동자 실태를 조사하고 밝히고, 익명의 고통에 이름을 붙여 세상에 알리는 역할까지 하는.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을 만나려 병원 1층에 들어섰다. 원장실로 가기 위해 위쪽이 아니라 지하 2층에 내려갈 때, 반면 노동자들이 재활하는 공간은 가장 높은 7층에 있단 걸 알았을 때. 복도에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과 사진이 빼곡히 있는 걸 봤을 때. 녹색병원의 단단한 꿈 같은 게, 강한 철골처럼 여길 지탱하는 내력을 형성하고 있단 걸 알았다.

머니투데이

녹색병원 원장실로 향하는 계단. 지하 2층에 있다. 통상적인 병원장실 위치와는 조금 달랐다./사진=남형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좋아하는 소설 '어린 왕자' 속 문장이 큰 액자에 담긴 걸 볼 무렵, 원장실에 도착했다.


폐지 모으던 할머니가 쓰러졌고…뒤에선 차가 빵빵거렸다

머니투데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폐지 수집 노동자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녹색병원이 서울 중랑구청과 협약을 맺고, 이들의 치료를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단 걸 알아서였다.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에선, 고령인 폐지 수집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질환에 고통받는 걸 줄이려 '운반 도구'를 개발하고 있다.

계기가 뭐였을까. 임상혁 원장이 떠올린 장면이 이랬다.

"할머니께서 폐지 수집하시다가 턱에 걸려 쓰러지신 걸 봤어요. 뒤에서는 차가 비키라고 빵빵거렸지요. 저 분들에게 뭘 하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치료도 하고 검사도 해드리고요."

머니투데이

노동환경연구소에선 폐지 수집 노동자 여럿을 따라다니며 상세히 취재했다. 그들이 꺼내놓은 말들이 이랬다.

'리어카 자체 무게가 50킬로가 넘는다. 허리 힘으로 끌어야 한다. 박스 안의 쓰레기를 빼내서 따로 치우고, 줍는 모든 과정에서도 허릴 굽혀야 한다. 허리가 가장 아프다. 박스를 만지는 손목도 너무 아프다.'(75세 여성 A씨)

'한 남자가 리어카로 재활용품을 수거하고 있었다. 코 앞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걸 봤다. 그 이후론 조심하지만, 겨울철엔 자주 미끄러져 넘어진다. 다리가 가장 많이 아프다. (그렇게 해서 모으는 돈은) 하루 3000원이다.'(100세 여성 B씨)


병을 숨긴다, 일자리가 없어질까 봐

머니투데이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이 벽면에 있는 감사패 등을 설명하는 모습./사진=남형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프지 않았으면 싶을 때, 어떻게 치료해줄 수 있을까. 경제적 부담을 덜면 될까. 그래서 녹색병원이 무상으로 검사해주고 치료해주겠다고 했다. 그로 인해 해결이 됐을까. 그리 단순한 게 아녔다.

"병원에 오신 폐지 수집 노동자분들은 총 20명 정도밖에 안 돼요. 건강하실 수도 있고, 다른 병원에 다니실 수도 있겠지요. 근데 제일 많은 건 아마 생계 때문에 못 오시는 게 제일 많지 않을까 싶어요. 무료로, 비용을 전혀 안 들게 우리가 해준다고 해도요."(임상혁 원장)

"병원비를 해결해준다는데 생계 때문에요? 왜요?"(기자)

"돈을 벌어야 해서요. 폐지 수집 어르신뿐 아니라 힘든 노동자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가 만약에 일을 하지 않으면 일자리가 없어지기도 하니까요."(임상혁 원장)

머니투데이

/사진=남형도 기자(녹색병원에서 촬영)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치면 치료한단 '상식'이 어디나 통하는 게 아녔다. 하청업체, 일용직 노동자, 가장자리의 노동. 아프면 잘릴까 봐, 치료하면 일자리가 없어질까 봐, 그래서 병을 꼬박꼬박 숨긴단다. 그러다 병이 커져 결국엔 더 아파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임 원장은 너무 많이 봤다고 했다.


치료받는 동안의 '생계' 문제…50~100만원씩 줘봤더니

머니투데이

학교급식노동자 폐암 산재 피해자가 지난해 6월 28일 오전 열린 학교급식노동자 폐암 산재 피해자 국가 책임 손해배상청구소송제기 기자회견에서 증언하고 있다./사진=뉴스1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가 쓴 책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엔, 다양한 영역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이 잘 나와 있었다.

'국솥 규모나 볶음 전용 솥 크기는 가히 욕조급이다. 좁은 공간에서 뛰듯이 움직이다보면 여기저기 부딪치는 건 다반사다. 집에 돌아가 샤워한 뒤 거울에 비친 몸을 보면 멍투성이란다. 데이고 베이고, 손과 팔뚝은 노동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럴 때는 좀 슬프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좋은 밥, 맛있는 반찬 만들어주는 게 그냥 막 기쁘다고 한다.'(학교 급식실 노동자)

'민원전화 받고 있으면 유리방(사무실)에서 쪽지가 오는데 그거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 받죠. 민원 처리 빨리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에 이석 시간이 5~10분 정도 밖에 안 돼요. 화장실만 잠깐 갔다 오고 하루 종일 물도 안 먹고 그렇게 일을 했어요.'(정부기관 콜센터 노동자)

머니투데이

전남 장성군의 한 중학교 급식실에서 에어컨 설치 공사를 하다 폭염으로 목숨을 잃은 20대 청년 고 양준혁 씨 가족과, 그의 영정사진./사진=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치면 치료받아야 하는데. 치료받고 일터로 다시 돌아가 일하는 비율이 45%밖에 안 된단다. 제일 큰 애로사항이 이렇다고 했다.

"치료가 어려운 게 아니라, 이분이 치료받는 동안 생계가 어려운 거예요. 치료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만 없는 '상병수당(병가를 내면 일정부분 급여를 주는 것)' 도입이 시급한 거예요."

그러면서 상병수당으로 노동자들을 치료한 사례를 들려줬다. 예전에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에서 전태일재단에 기부하면서, 그중 일부인 4500만원을 녹색병원이 쓰도록 낸 적이 있었다. 온누리 상품권이었다.

머니투데이

녹색병원에서 치료 받고 회복 후 일터로 돌아간 노동자가 남긴 감사의 손편지./사진=임상혁 녹색병원 원장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임 원장을 쓰임처를 고민하다 상병수당을 주는 걸로 실험해봤다. 적으면 50만원, 많으면 100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한두 달 만에 다친 사람들이 다 와서 재활 치료를 받았다. 그 정도만 받아도 노동자들이 치료한단 걸 알게 됐다. 그중 천안에서 치료를 잘 받은 노동자가 쓴 손 편지 내용이 이랬다.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약간은 두려움으로 서울에 왔습니다. 한 분 한 분 치료해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손길들이 마치 엄마처럼 따뜻하고 포근했습니다. 제가 언제 이렇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녹색병원 최고입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아픈 사회'와 함께

머니투데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녹색병원이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전태일의료센터'. 이는 지금껏 해온 치료를 더 잘하자는 의미이며, 병원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다 같이 하자는 의미라고 했다. 임 원장이 진단한 사회는 꽤 아픈 상태인 듯했다.

"우리가 단순하게 아픈 사람 병만을 치료하는 게 아니에요. 아픈 사회를 치료하고, 아픈 사회와 함께하자, 이런 거거든요. 아무도 손대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아픈 사회일 수 있잖아요. 노인들이 새벽에 나가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져요. 근데 그걸 국민들이 힘을 합쳐 그런 걸 바꿔보면, 정말 아픈 사회를 치유하는 모습이 되겠지요."

그럼 사회는 왜 아픈가를 물으니, 의사는 '양극화'를 원인으로 꼽았다. 경쟁이 심하고 공정하지 못한 사회. 그런 게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는 걸 막아내는 거라고.

머니투데이

폐지 수집 노동자를 위해, 박스를 해체한 뒤 '이어줄'로 묶은 모습. 동떨어진 우리와 자원재생활동가의 관계가 이리 이어질 수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처방전은 '공동체 회복'이라고 했다. 힘든 사람을 도와주는 게 공동체가 복원되는 거라고. 녹색병원은 그런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고 했다. 예컨대, 이런 걸 꿈꾼다고 했다.

"방문 의료센터도 만들고 싶어요. 우리가 방문 진료를 가면 하루 종일 집에만 계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왜 못 움직이냐면 휠체어가 턱을 못 넘는 거예요. 반지하 계단, 못 올라오죠. 그거만 없애주면 마을로 나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웃이 집을 고쳐주고, 휠체어를 밀며 함께 산책하고. 지역 주민들과 건강과 돌봄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 그런 걸 해보면 좋겠어요."

머니투데이

녹색병원 복도 벽면에 걸려 있던 글귀./사진=남형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처음 꿈을 말하는 청년처럼 얼굴이 빛났다. 이 일을 36년이나 해온 이의 표정이 그랬다. 어찌 보면 의사로서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거나, 그런 걸 뒤로하고 이리 몰입하게 하는 힘이 뭘까. 끝으로 궁금한 걸 물었다.

"진짜로 내가 왜 그럴까, 내가 사람들이랑 술 먹고 얘기하고 이런 걸 좋아하니까 그럴 수도요(웃음). 이리 사회와 사람들을 좋아하고, 이런 걸 같이 아파하고, 그런 선한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필요한 일이잖아요. 그러니 떠나기가 어렵고, 계속해 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머니투데이

일용직 노동자들이 점심을 먹느라 걸어둔 안전모들. 하나하나 빠짐없이 누군가 사랑하는 가족. 더하여 두 번은 없을 고유하고 귀한 생이다./사진=남형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epilogue).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에서 쓴 책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 노동자들의 마음을 읽어냈던 해치 교수의 질문이라고 했다.

'저 노동자는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나는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내 아들 딸이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이어 덧붙인 문장이 이랬다.

'모든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노동은 존중되고 일터는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머니투데이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김군의 가방 속에선, 차마 먹지도 못한 컵라면 한 개가 나왔다. 사고 현장 스크린도어 앞에서 국화꽃을 헌화하며 추모하는 시민들./사진=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