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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장은수의 책과 미래] 상처 염려증과 심리적 방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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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서점에 관련 도서가 숱하다. 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말라느니,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관계의 힘이라느니,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느니, 누구에게도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느니,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느니… 이른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 관한 충고들이 미주알고주알 넘쳐난다. 책들이 전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네가 아직 상처받지 않았다면, 피하는 법을 알려주마. 지금 상처받는 중이라면, 대처법을 말해주마. 이미 상처받았다면, 이겨낼 힘을 길러주마. 상처 염려증 사회의 수상쩍은 처방전인 셈이다.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을유문화사 펴냄)에서 호주 철학자 딘 리클스는 외부의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고 끄떡없이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을 '심리 방탄'이라고 부른다. 이는 마음에 갑옷을 입혀 난공불락의 자아 요새를 구축하려는 신경증의 일종이다. 자아 요새는 세상 무슨 일이든 감당할 수 있을 듯한 착각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방탄 갑옷은 취약한 마음을 보호하지만, 지나치면 우리를 외롭고 공허하며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상처를 줄 수 없는 너만 있는 세상에서, 상처받을 이유 없이 사는 사람은 실제론 타자를 얕잡아보는 자이다. 오만한 자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으려다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인간이 되곤 한다. 카를 융은 말했다. "어리석은 자만 남의 책임에 관심이 있다." 상처를 허락하지 않는 사랑도 없고,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관계도 없다. 방탄 자아는 사실상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게 한다.

리클스에 따르면, 취약성으로부터의 도피는 자기 학대로 이어진다. 상처에 집착하면 심리 방탄이 살짝만 깨져도 도무지 견디지 못한다. 아주 작은 틈만 눈에 들어와도,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면서 혹독한 자기 처벌을 행한다. 실점하지 않는 골키퍼는 없는데도, 이들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나오지 않으려 한다. 상처 염려증에 시달리면서 제 손으로 자기 미래를 지옥으로 만든다. 낯선 세상이 두려워 부모 뒤에 자신을 감추는 아이처럼 행동해선 삶을 절대 번창시킬 수 없다.

방탄이 아니라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상처의 수용성은 인간 성숙의 증표다. 좋은 삶은 상처의 긍정에서 시작한다. 류시화 시인이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고 읊고, 공지영 작가가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사랑의 본질은 용기와 도전이고, 인생에 상처를 허락하는 마음이다. 답답한 인생의 출구는 오직 '자유라는 기적을 행하는 데' 달려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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