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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금)

폰 주고 월급 올리니, 병사들 도박·코인 베팅...돈 빌려 수천만원 탕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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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 도박 범죄 1년새 1.5배 급증

조선일보

그래픽=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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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1살 아들을 군대에 보낸 이모(51)씨는 지난 8월 부대에서 연락을 받았다. 아들이 휴대전화로 불법 도박을 하다가 적발됐다는 내용이었다. 사채도 모자라 동료 병사들에게까지 돈을 빌려 3000만원을 도박으로 탕진했다고 한다. 이씨는 “아들이 고1 때부터 불법 온라인 도박에 손을 댔다”며 “군대에 가면 철이 들 거라 기대했던 내가 틀렸다”고 했다. 이씨 아들은 결국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국방부는 2020년 7월 병사들의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허용했다. 보통 오후 6시 일과가 끝나면 자유롭게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 요즘 일선 병영은 동기 10명이 개인 침대를 사용하는 ‘침대형 생활관’ 중심으로 운영된다. 수십 명이 수용된 ‘침상형 내무반’에서 고참병이 후임병의 생활을 통제하던 과거 병영이 아니다. 저녁이 되면 상당수 병사가 생활관에서 휴대전화로 코인을 한다.

조선일보

그래픽=이철원


게다가 병사 월급(병장 기준)은 2019년 40만원에서 내년 205만원(내일준비지원금 포함)까지 오른다. 현역병의 의식주는 모두 국가가 해결한다. 육군 전방 부대의 김모(25) 병장은 “마음만 먹으면 한 푼도 쓰지 않을 수 있다”며 “월급을 몇 달만 모아도 몇 백 만원이 되니 코인을 안 하는 사람이 바보라는 분위기”라고 했다. 강원도에서 복무 중인 A 병장은 지난 3월 지인의 추천으로 14개월 동안 모은 월급 500만원을 ‘피스네트워크’라는 코인에 투자했다가 몽땅 날렸다. A 병장은 “일과 시간에 코인 가격이 갑자기 급락해버려 손쓸 새가 없었다”고 했다.

공군에 복무 중인 B 상병은 “요새 동기들 사이에서 미국 주식이 인기”라며 “지난 7월 적금을 깨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을 300만원어치 샀는데 주가가 15% 떨어져 걱정”이라고 했다. 육군 모 부대 중대장 강모(31) 대위는 “병사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개인 정비 시간에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다”며 “일부 병사들은 휴대전화를 두 대 들고 와 한 대만 제출하고 한 대는 숨겨놓은 뒤 일과시간에 몰래 사용하거나, 밤새도록 코인을 하다가 적발되기도 한다”고 했다. 국방부는 수년 전 병사들의 코인·주식 투자 규제를 검토했으나 ‘기본권 침해’ 소지가 있어 불발됐다.

일부 병사들은 코인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도박에 손을 댄다. 요즘 불법 도박은 휴대전화로 손쉽게 접근 가능하다. 국민의힘 유용원 의원에 따르면, 2022년 병영 내 299건이던 불법 도박 범죄가 지난해에는 440건으로 1.5배 가까이 증가했다. 지난해 12월 육군의 한 병사는 휴대전화로 불법 도박사이트에 접속해 700여 회 걸쳐 7000여 만원을 베팅하는 등 도박을 하다 적발됐다. 같은 해 10월 한 육군 방공부대에서는 입대 전 도박에 중독됐던 한 병사가 휴대전화로 불법 도박을 하다 적발됐는데, 이 병사는 700차례에 걸쳐 3억5000만원이나 도박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8월까지 적발된 불법 도박 범죄는 318건이다. 최근 4년 6개월간(2020년~2024년 6월) 전군 군사경찰에 형사 입건된 휴대전화 관련 범죄 중 도박은 1664건으로 전체의 51.2%를 차지했다. 육군의 한 부대에서 복무 중인 박모(23) 상병은 “(불법 도박을) 소대 내에서 4~5명은 하는 것 같다”며 “사설 스포츠 토토를 가장 많이 하고, 사다리타기나 홀짝 게임도 한다”고 했다. 지난 7월 전역한 신모(23)씨는 “생활관 전체가 불법 도박을 하는 경우도 있다”며 “주변에서 돈을 땄다고 자랑하면 호기심에 너도나도 따라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했다.

코인과 도박에 빠진 병사들은 사설 대부업체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병사들이 200만원 가까운 월급을 받기 시작하자 ‘충성론’ ‘병장론’ 같은 현역병 대상 상품이 쏟아졌다. 대부분 연 이율 20% 안팎의 고리대금이다. 휴대전화 앱이나 메신저로 상담은 물론, 대출 실행까지 할 수 있다. 2일 본지 기자가 한 대부 중개업체에 급전 대출을 의뢰했더니 해당 업체 관계자는 나이와 군 소속·계급, 신용점수 등 몇 가지 정보를 물은 뒤 “심사 후 특이 사항이 없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최대 300만~500만원까지 송금받을 수 있다”며 “이율은 연 19% 정도”라고 답해 왔다.

이런 대부업체를 이용하다가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아예 파산의 늪으로 빠지는 병사들도 속출하고 있다. 지난 8월 한 현역 병사 C씨는 “도박 때문에 3000만원 정도의 빚이 생겼다”며 “군대에서 월 8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고 있는데 이자만 내도 벅차고 곧 있으면 연체까지 돼 개인회생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또 다른 병사 D씨는 “도박으로 수중에 있던 돈을 다 날렸다”며 “월급은 100만원인데 이번 달에 나가야 하는 돈은 400만원인데다 대부업에서 받은 600만원까지 다 잃었다”고 했다.

법무법인 혜명 오선희 변호사는 “현역 병사도 국민이므로 파산과 개인회생 모두 신청할 수 있다”며 “다만 법원에 출석하는 것은 물론 재산과 소득 규모, 채무 규모 등 개인회생 신청 자격을 충족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고 했다.

국방부는 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분기별로 1회 도박 예방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지만, 신용관리나 재무관리 방법, 금융사기 예방법 등을 알려주는 전문적인 금융 교육은 필수가 아니다. 지난해 8월 육군은 예금보험공사와 장병 대상 금융교육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으나, 강사 부족 등의 이유로 연간 100개 부대 정도만 해당 교육을 들을 수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병사들을 대상으로 가상자산 투자 사기와 불법 도박 예방 등 금융 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김영호 을지대 중독재활복지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주로 부사관이나 장교들이 도박 문제에 얽혀 있었지만, 지금은 군인들의 급여 수준이 높아져 도박과 코인 중독에 빠져드는 사병들이 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군에서도 병사들에게 건전한 소비 및 저축 습관 등 합리적인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제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일각에선 병사들의 개인회생 여건을 군이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지만, ‘군의 본연 임무와는 거리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구동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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