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3시 경복궁 흥복전에 준비된 교실용 책걸상에 모자를 쓴 사람들 100여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원고지를 채웠다. 아나운서가 여러 문장을 반복해 읽자 각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받아 적었다. ‘하얗디하얀’ ‘엊그제’ 등 띄어쓰기나 받침 등 맞춤법이 까다로운 단어들이 섞인 탓인지 고개를 갸웃하는 참가자도 드문드문 보였다.
제1회 ‘전 국민 받아쓰기 대회’가 열렸다. 국립국어원·한국방송공사가 공동 주최하고 국어문화원연합회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한글 주간(2~9일)’을 기념해 열렸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받아쓰기 대회인 ‘딕테(La Grande Dictée)’를 본떴다”면서 “최근 국내에서도 ‘문해력 논란’이 끊이지 않아 한글 규정에 대한 관심을 재미있게 환기하고자 이런 행사를 열었다”고 했다.
대회 본선 경연이 경복궁에서 열린다는 공지가 전해지자 “조선시대 과거 시험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지난달 7일 전국 8개 지역 시험장에서 치러진 예선에는 총 3320명이 접수했고 이중 추첨을 통해 선발된 655명이 시험을 봤다. 맞춤법이 까다로운 단어나 구문이 들어간 문장 10개를 읽는 소리를 각각 3번씩 듣고 이를 제공된 원고지에 받아 적어야 했다. 참가자들은 “태국 ‘푸껫(phuket)섬’을 ‘푸껫’으로 적는 게 표기법상 맞는 줄 몰랐다”며 원성을 토하기도 했다.
예선을 통과한 100여 명이 참여한 본선도 비슷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약 40분 동안 긴 문장으로 구성된 2문항을 빠른 속도로 한번 듣고, 아나운서가 느린 속도로 2번 반복해 읽었다. 참가자들은 이후 주어진 15분 동안 제출용 원고지에 답안을 옮겨 적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본선에 출제된 문항은 인공지능을 활용해 제작됐다. 관계자는 “역량을 평가할 ‘킬러 단어’들을 인공지능에 입력해 문장을 구성한 후 국립국어원 소속 연구관과 외부 전문가들이 비문을 바로 잡아 문제를 출제했다”고 했다.
심사위원들이 약 40분간 채점한 끝에 최고점을 얻은 이재명(35)씨가 ‘으뜸상’을 받았다. 대구 북구의 초등학교에서 체육 교사를 하고 있다는 이 씨는 “평소 친구들 사이에서 ‘맞춤법 경찰’로 불리고, 취업 준비생 시절 친구들의 자기소개서 첨삭도 도와주곤 했다”면서 “맞춤법은 오로지 관심으로 공부했고,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한 끝에 이렇게 상도 탈 수 있었다”고 수줍게 웃으며 소감을 전했다.
[김보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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