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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살인범 누명 써 감옥에서 10년... 변요한은 왜 '사이다 복수'를 하지 않았을까 [K컬처 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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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
'사적 복수' 없이 '평범한 이웃은 어떻게 악인이 되는가'에 주목
환생도 회귀도 없이 지옥에서 탈출하기

편집자주

K컬처의 현안을 들여다봅니다. 김윤하, 복길 두 대중문화 평론가가 콘텐츠와 산업을 가로질러 격주로 살펴봅니다.
한국일보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에서 친구 둘을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선 주인공 고정우(변요한).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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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에는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나 설명하기 복잡한 사건들을 일컫는 단어들이 있다. 그래서 독일어를 전혀 모르지만 '왜 이런 것까지 단어로 만들어 놓았지?' 싶을 만큼 신기한 표현들은 쉽게 잊을 수가 없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느끼는 묘한 기쁨을 뜻하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나 타지를 그리워하는 감정이자 향수병의 반대 개념인 '페른베(Fernweh)'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벨트슈메르츠(Weltschmerz)' 역시 독일어에만 존재하는 표현 중 하나로 '세계에 대한 고통', 즉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폭력, 모순, 부조리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환멸과 비애를 가리킨다. 주로 전쟁과 범죄에 관한 뉴스를 볼 때 가질 만한 감정이지만, 최근 한 드라마를 보며 쉴 새 없이 '벨트슈메르츠'를 느끼며 괴로웠다. 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MBC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이다. 2022년 모든 촬영이 끝난 뒤 편성을 기다리며 2년여 동안 '창고'에 있었던 이 드라마는 방송 후 입소문을 타더니 지난 4일 8%대 시청률로 종방하며 '흥행 반전'을 일궜다.

어머니도 아들을 외면했다

내용은 이렇다. 고정우(변요한 분)는 하루아침에 친구 둘을 살해한 흉악범이 된다. 결백을 주장하고 싶지만 사건 당일 만취한 채 잠이 든 그에겐 아무 기억이 없다. 모범생이었던 아들을 신뢰하던 부모가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나서지만, 이미 모든 증거와 증언이 정우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결국 정우는 기억나지도 않은 범행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한 뒤 10년형을 받는다.

감옥에서 10년 동안 괴롭힘을 견디고, 아버지의 죽음조차 곁에서 지킬 수 없었지만 정우의 지옥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뒤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수감 기간 중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은 어머니마저 아들에게 "마을을 떠나라"며 냉랭한 태도를 보인다. 고향 친구들은 "너의 결백을 믿는다"고 위로를 건네지만 누구도 자신을 진심으로 반기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우의 어머니가 육교에서 추락한다. 그것이 사고가 아닌 사건임을 확신하게 된 정우는 그 분노를 원동력 삼아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된 10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고구마 전개'의 숨은 위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블랙아웃'이라는 부제에 충실하듯 명확한 증거 없이 살인범이 된 정우가 자신의 지워진 기억을 하나씩 추적하며 진범을 찾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그러나 이 작품은 최근 유행하는 '사적 복수' 소재의 드라마들과는 사뭇 다른 전개 양상을 보인다. 정우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주인공이지만 회귀를 통해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파편처럼 흩어진 사건들을 묵묵하게 맞춰 나간다.

무죄를 입증하면 입증할수록 정우를 지탱하던 세계는 무너져 내린다. 진실이 밝혀질 때마다 이웃이자 친구였던 이들은 모두 가해자, 방관자, 동조자가 된다. 이 작품엔 소위 '사이다 전개 혹은 복수'가 없다. 정우의 비극에 이입하는 시청자들의 속은 더욱 막혀가지만, 작품은 그 체증을 결코 쉽게 풀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에게는 서사가 없다'는 명제를 거스른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살다 외도하게 된 여자,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격지심을 가지게 된 남자, 출세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국회의원과 원조교제를 일삼는 그의 남편, 이 모든 사건을 컨트롤하려 하는 비리 경찰 그리고 이 어른들을 그대로 학습하고 자란 아이들까지. 작품은 '평범한 이웃은 어떻게 악인이 되는가'라는 전혀 다른 각도의 질문을 던지며 가해자들이 처한 사정들을 살핀다. 그렇게 마을 구성원들의 개인사를 주목하며, 10년 전 무천에서 일어난 두 명의 여고생 살인사건은 이들이 은폐한 비밀이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 촉발된 것이었음을 밝혀낸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가해자들의 악의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사회를 나쁘게 만드는지를 천천히 보여준다. 이런 '고구마' 같은 전개는 현실로 뻗어 나와 공명한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야 할 피해자의 삶이 재건되는 데에는 반드시 연대자들의 묵묵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가해자에 대한 복수, 내가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 제3자의 심판이 판치는 K콘텐츠 시장에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진정 정의에 닿고자 할 때 넘어야 할 수많은 고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복길 대중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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