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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정동칼럼]사과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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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는 과거 ‘선감도’라 불렸던 지역이 있다. 그곳에는 1942년부터 1982년까지 5000여명의 강제수용된 어린이들에게 강제노동, 학대, 암매장 등이 행해졌던 선감학원이 있었다. 수백명의 아이들은 과거 섬이었던 그곳을 탈출하다가 익사했다. 선감학원의 학대생존자들은 2020년 12월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하자마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2022년부터 아이들이 암매장된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시굴이 행해졌으며, 경기도는 지난 8월 본격적인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희생자들의 작아도 너무 작은 분묘는 185기여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난 토요일에는 아홉 번째 선감학원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지난 7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제출한 제6차 국가보고서를 심의하고 시설수용 및 과거사 피해자의 구제 보장을 권고했다. 정부가 피해자들을 위한 배·보상을 하고, 공식적 사과와 함께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해당 심의에는 1950~1960년대 부산 지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영화숙·재생원의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가 참여하여 당시의 참상을 직접 증언했다. 위원회는 이례적으로 긴 시간을 할애해 귀를 기울였다.

뿐만 아니다. 진실화해위는 이미 형제복지원, 대구희망원, 서울시립갱생원, 천성원 등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여기까지 보면 한국 현대사 특유의 국가폭력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야 할 길이 멀다.

무엇보다 생존자를 발견하는 작업이 직권조사가 아닌 신청에 의해 이루어진다. 학대생존자들이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고, 정부의 조사사업에 대해 알고, 기한 내에, 스스로 신청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은 당사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 어린 시절 학대로 인한 노쇠하고 핍진한 몸을 이끌고 밟기에는 지난한 행정 절차다. 신청 기간이 정해져 있어 늦게 발견된 생존자들은 피해자로 인정받기 어렵다. 생존자가 맞는지 기록을 대조해 보아야 하지만 반드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 가슴 아픈 현실은 이러한 피해 조사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오랜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가의 행정엔 적시성과 적절성이 필요하다. 제때, 제대로 된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 비록 진실화해위 활동으로 과거 국가폭력에 대한 정부 대응에 진일보한 측면이 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선 모든 과정이 너무 느리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절차는 관료적이다.

적시성과 적절성을 갖춘 사과란 무엇일까. 첫째,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사과다. 이미 몇몇 관련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에 대한 상징성과 일반 시민들에 대한 가시성이 부족하다. 과거사에 대한 사과는 떠들썩하고 알려져야 한다. 그래야 생존자의 사회적 명예 회복이 가능하다. 둘째, 사과는 언어를 넘어 피해 구제 과정 전반에서 존중으로 나타나야 한다. 역사적 의미에 부합하는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편성해야 하고, 직권조사와 신청을 병행하고, 활동 기간을 확보해야 한다. 피해 사실 조사 과정에서도 생존자 친화적인 조사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기록이 부족할수록 생존자들의 상호 증언을 신뢰해야 하고, 조사 과정이 중복되어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증언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관료적 언어가 아니라 생존자들을 배려하는 언어로 진행·기록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사를 넘어 생존자들의 회복을 위한 지원 역시 필요하다. 셋째, 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생존자 친화적 절차가 정교화되며, 상시적으로 생존자를 발굴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상시 조직 설치를 위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여 과거사 조사 기능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국가가 수용시설들에 기능을 위임했을 때, 공적 폭력은 넓게 퍼졌고, 사실은 발견하기 어려워졌다. 위임된 폭력은 위임된 범위를 넘어 행사된 반면, 국가의 법적 책임은 얇아졌다. 그렇기에 현대 국가는 역사적 결과에 포괄적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질서 유지의 명분으로 희생된 잔여적 존재들의 삶을 싸매는 것이 정의이고 국격이다. 저질러진 폭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회복이란 없다. 생존자들이 안고 살아가는 역사적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하는 것이 지금 여기 국가의 의무다. 국가가 외면한 사이 생존자들의 나이는 어느새 70대에 이르렀다. 과거의 폭력에 대해 국가가 제대로 사과할 수 있는 시간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경향신문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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