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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전쟁은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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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폭격을 하면서 어린 아기가 숨지자 한 팔레스타인 여성이 비통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칸유니스/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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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준 | 토요판부장



지난 7일 알리 타윌은 첫돌을 맞았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중부의 한 난민캠프에서였다. 지난해 10월7일 알리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폭격하기 시작하던 때 태어났다. 그날 아침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를 기습 공격한 뒤 이스라엘이 전면 반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알리의 엄마 아말은 출산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가던 중이었다. 알리가 태어난 지 열흘 만에 피난길에 오른 가족은 이후 내내 이스라엘 전투기의 폭격을 피해 좁은 가자지구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아남아야 했다. 아말은 에이피(AP) 통신에 “모든 면에서 매우 힘든 한 해였다. 매일 폭격과 살상이 벌어지는 환경에서 아이가 자랐다”고 말했다. 갓 돌맞이를 한 알리의 잠재의식에 어떤 트라우마가 새겨졌을지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알리는 그래도 아직까진 운이 좋은 편이다. 지난 8월 말 팔레스타인 가자 보건부 발표에 따르면, 전쟁 11개월째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만 3만4344명, 이 중 710명은 첫 생일을 맞기도 전에 짧은 생을 마감한 영아들이다. 주검 훼손이 심한 신원 불명 사망자와 무너진 건물 잔해 밑에 깔린 실종자까지 더하면 전쟁 1년 새 가자지구에서만 최소 4만2천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 70%는 여성과 어린이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728명(하마스 기습공격 때 381명 포함), 민간인 사망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가보 마테는 캐나다 국적의 의사다. 아동기 발달, 트라우마, 자가면역 질환,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중독이 신체·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한 권위자다. 그의 저서 중 ‘정상이라는 환상’(한빛비즈), ‘아이의 손을 놓지 마라’(북라인),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김영사) 등은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왔다. 그는 1944년 헝가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1살 때 캐나다로 이주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외조부모는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됐고, 아버지는 나치 독일의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그런 성장 배경 때문에 젊어 한때는 시오니즘의 지지자였고, 신생 조국 이스라엘에 뿌듯한 자긍심을 느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진실에 눈을 뜨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 7월 일간 ‘토론토 스타’에 실은 기고에서 그는 “하마스의 로켓이나 민간인 테러 공격은 가자지구의 맥락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으며, 그 맥락은 근세와 현재에 걸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인종 청소 작전, 즉 팔레스타인 민족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스라엘은 정의로운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점령과 점진적 합병, 비인도적 봉쇄, 올리브숲 파괴, 수천명의 자의적 투옥, 고문, 민간인에 대한 일상적 굴욕, 주택 파괴: 이런 정책은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어떤 열망과도 양립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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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9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가자지구 북부 샤티 난민 캠프가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아 인근 모스크가 무너지자 그 잔해를 살피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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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년 전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민간인 축제 현장을 급습해 1200여명을 살해하고 250여명을 납치한 사건은 비난받아 마땅한 비인도적 만행이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파괴와 살육으로 진행돼온 반격의 실상은 훨씬 더 야만적이고 끔찍한 전쟁범죄다.



지난 4월 말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독립적 비정부기구 ‘유럽-지중해 인권 모니터’는 이스라엘이 전쟁 개시 200일 동안에만 서울시 면적의 절반에 230만명의 인구가 밀집한 가자지구에 7만톤이 넘는 폭탄을 쏟아부은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런던 대공습(1940~1941년)과 연합군의 독일 함부르크(1943년), 드레스덴(1945년) 공습 때 투하된 폭탄 총량의 3.5배나 되는 융단폭격 수준이다.



현재 가자지구는 상업시설의 80%, 주거 건물의 60%, 학교 건물의 87%, 도로망의 68%, 경작지의 68%가 파괴되고 병원 36곳 중 절반이 제 기능을 잃은 폐허의 도시다. 지난 5월 유엔개발계획은 가자지구의 전후 재건 속도가 2014년과 2021년 전쟁 이후와 같을 경우 “완전히 파괴된 주택을 모두 복구하기까지 약 80년이 걸릴 것”이라고 평가했다.



가자전쟁이 1년을 넘긴 지금, 이스라엘은 휴전은커녕 레바논과 이란까지 공격하며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국제 전문가들이 지정학적 분석과 국제정치의 역학, 향후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팔레스타인 땅의 현실 앞에서 공허한 사변 같은 무력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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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9일(현지시각) 이스라엘 남부 가자지구 국경에서 이스라엘 여군들이 밝은 표정으로 가자지구 폐허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이들이 현역 군인인지 훈련병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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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194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벨라루스인,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알렉시예비치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쟁 범죄’이며 러시아를 지원한 벨라루스도 침략국”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앞서 1985년 그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고 갈파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맞서 자원입대했던 소비에트연방 여성 200여 명을 인터뷰한 첫 저작의 제목이다(국내에는 2015년 번역서가 나왔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파괴하는 전쟁의 파괴적 폭력성을 고발한 그의 말은 확대돼 읽혀야 마땅하다. “전쟁은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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