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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대통령에게 가장 무서운 ‘비토 플레이어’는 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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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를 통해 상황을 바꾸거나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는 행위자를 ‘비토 플레이어’라 한다. 대통령에게 가장 무서운 비토 플레이어는 여당이다. 108석이란 여당 의석을 감안하면 단 8명의 의원이 뭉치면 대통령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그렇다. 지금 국민의힘은 대통령 제어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다.



한겨레

지난 4일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돌아온 김건희 특검법, 채상병 특검법 등에 대한 재표결 결과지가 의사국장한테 전달되고 있다. 김건희 특별법이 결과지 맨 위에 보이는데, 찬성 194표에 반대 104표, 기권 1표, 무효 1표가 나와 최종 부결됐다. 이는 국민의힘 의원 108명 가운데 4명이 반대표에서 이탈한 것으로, 여당 지도부가 강조한 ‘단일대오’는 깨진 셈이 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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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하고, 허망하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는데, 어떻게 이토록 엉망이 될 수 있을까. 피로 얻어내고, 땀으로 쌓아 올린 민주주의가 한 사람 때문에 맥없이 망가지고 있다. 제도든 관행이든 도무지 속수무책이다. 그 무엇도 그의 폭주를 막지 못하고 있다. 야당에 절대 의석을 줘도, 여론조사가 바닥을 기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빗대자면 이러려고 민주주의 하나 싶다. 화가 나고 약이 오른다.



우리도 그렇지만 미국이 겪고 있는 혼란과 퇴행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대통령제의 약점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대통령에게 제왕적 권력을 허용한 탓 아닐까 하는 문제의식이다. 사실 민주주의 질, 국민의 삶이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흔히 내각제로 불리는 의회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와 달리 요즘엔 총리의 권한 또는 역할이 거의 대통령에 버금간다. 영국 노팅엄 대학 정치학 교수인 수 프라이스는 이를 ‘총리직의 대통령화’(presidentializing the premiership)로 표현한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이 대표적이다. 결국 제도보다 사람이 문제다. ‘제도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람 민주주의’가 포인트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기대와 부담을 지운다. 이래저래 대통령이 해답이고, 이러쿵저러쿵 대통령이 문제다. 제임스 바버라는 정치학자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몰락을 예견한 적이 있다. 그렇게 본 이유는 대통령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성격을 긍정적-부정적, 적극적-소극적으로 나누고, 이 요소들의 조합에 따라 리더십 유형을 분류했다. 닉슨 대통령은 적극적-부정적 성격으로 인해 강박적 리더십을 지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몰락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얘기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1그룹에 속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성공과 관련해 유명한 얘기가 있다.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 대법관이 루스벨트에 대해 “지성은 이류지만 기질은 일류”(second-class intellect but a first-class temperament)라고 평했다. 성격이든 기질이든 대통령이 어떤 품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그의 성공에 매우 중요하다. 그 직의 무게를 감안하면 한 나라의 운명과 국민의 삶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함께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답게 루스벨트에 대해 멋들어지게 말한 적이 있다. “넘치는 생기와 활력, 유연한 성품, 그리고 숭고한 확신, 그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루스벨트를 만난 일은 내게 첫 샴페인 병을 따는 것처럼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도리스 컨스 굿윈, ‘숭고한 확신’) 좀 과하게 표현하면 문제는 성격이다. 지성이나 능력은 그다음이다.



현대 대통령 연구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학자가 리처드 노이스타트다. 그에 따르면, 대통령 권력은 명령하는 힘이 아니라 ‘설득하는 힘’(power to persuade)이다. 그는 대통령 권력 자원을 세가지로 제시한다. 우선 대통령직이 갖는 제도적 권한과 권위가 있다. 이는 누구나 누리는 고유한 이점들이다. 그런데 정작 성패를 가르는 요인은 나머지 두가지다. 하나는 대통령의 정치적 평판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적 지지다. 정치적 평판은 정치권에서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의 차원이고, 대중적 지지는 국민적 평가다.



설득하는 힘도 개인적 자질에서 비롯된다. 노이스타트는 목적의식, 권력의지, 자신감을 거론하는데, 이런 자질은 정치적 경험과 올바른 기질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 두 변수가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정신적 자질을 형성하여 자조 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 해주어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백창재, ‘미국 대통령의 권력자원과 리더십’) 사회성과 공감능력 등을 가진 대통령들은 성공하고, 강박감이나 아집 등을 가지면 실패하기 쉽다.



많은 것이 대통령에게 달려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의 기질이나 성격으로 인해 혼란과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대통령제는 삼권 간 견제를 통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의회의 견제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다. 국민이 투표를 통해 책임을 추궁하고, 시정을 명령할 수도 있다. 허나 보다시피 의회의 견제나 국민 요구도 역부족이다. 시간만이 답일까?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수습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밀어붙였다. 국민적 지지도 있었다. 이런 노력에 대법원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주요 뉴딜 입법들에 대해 잇따라 위헌 판정을 내린 것이다. 첫 위헌 결정은 1935년 5월에 나왔다. 철도연금법에 대한 판결이었다. 이어서 전국산업부흥법, 농업조정법 등에 대해 위헌이라고 판정함으로써 대법원이 사법심사권을 무기로 뉴딜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선 꼴이었다. 화가 난 대통령은 1936년 11월 대선에서 역대급 승리로 재선된 뒤 이를 동력으로 곧바로 대법원 개혁에 나섰다. 1937년 2월 대법원 개혁(court packing plan) 법률안을 제출했다.



루스벨트는 처음 개헌을 고려했지만 그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포기했다. 대신 선택한 방법인 대법관의 수를 9명에서 최대 15명까지는 늘리는 것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보수 4명, 진보 3명에다 찰스 휴스 대법원장과 오언 로버츠 대법관이 사안에 따라 이쪽저쪽에 편드는 구도였다. 1921년 공화당의 워런 하딩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에 임명된 전직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는 대법원을 보수화시켰는데, 1930년 그의 사망 뒤에도 대법원의 보수 기조는 바뀌지 않고 있었다.



대법원 개혁안은 의회에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남북전쟁 이래 어떤 문제도 이같이 가족, 친구, 그리고 동료 변호사들을 극도로 분열시켰던 것은 없었다.” 당시 언론기사의 한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이 개혁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여당이던 민주당에서 상·하원을 막론하고 반대하는 의원들이 속출했고, 이 법을 심사하던 중 상원의 민주당 원내대표가 과로사하면서 사실상 폐기되었다.(김남균, ‘미국 사법심사제의 위기’)



“민주당원이고 2회에 걸친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를 지지하였고 또 앞으로도 그가 옳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계속 지지할 것이지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려는 시도에는 반대할 것이다.” 민주당 아서 필립 램넥 하원의원의 말이다. 이처럼 루스벨트가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의 명운을 걸고 밀어붙였던 대법원 개혁안은 여당, 더 정확하게는 여당 내 일부의 반대로 좌초했다.



‘아니요’를 통해 상황을 바꾸거나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는 행위자를 ‘비토 플레이어’(veto player)라 한다. 대통령에게 가장 무서운 비토 플레이어는 여당이다. 108석이란 여당 의석을 감안하면 단 8명의 의원이 뭉치면 대통령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정치에서 흔히 계파 또는 정파로 불리는 일부 세력이 교착을 끊거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 지금 국민의힘은 대통령 제어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다. 이게 숨겨진 진실이다.



추측건대, 여당이 굴종하는 이유는 탄핵 트라우마에 있다. 지난 탄핵의 재앙적 효과에 대한 학습으로 또 탄핵당하면 다음 대선 필패와 굴욕적 수세에 직면할 거란 두려움에 절어 있다. 지금처럼 대통령을 추앙하고 민심을 배척하면 탄핵도 막고, 대선에서도 승리할 수 있나. 대선 패배 후 1년 뒤에 치르는 23대 총선에서 얼마나 살아남을까. 패배를 넘어 존폐를 걱정하게 될 수도 있다.



정치의 역동성은 권력을 향한 경쟁에서 비롯된다. 권력의지를 가진 정치인들의 용기 있는 도전이 세상을 바꾼 예는 얼마든지 있다. 국민은 그런 용기를 열망하고, 그런 인물을 지지한다. 무엇을 주저하랴.



한겨레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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