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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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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부친 “딸이 전쟁으로 사람 죽는데 노벨상 잔치 안 된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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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 노벨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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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도 진즉 (문학으로) 홀로서기를 한 사람인데, 계속해서 한승원의 딸이라고 하면 어색하지.”



11일 오전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 ‘해산토굴’에서 만난 한승원(85) 작가는 “아버지보다 더 잘되는 게 효도”라고 말했다. 해산토굴은 한 작가가 귀촌해 살면서 글을 쓰는 집필실이다. 2016년 딸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전에는 ‘한승원의 딸’ 한강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이 되어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이들 부녀는 ‘이상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를 2대가 수상했다. 아버지는 전날 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 “내 딸이 최고다”라고 축하했다.





마을 잔치를 취소하며





한 작가는 처음엔 “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게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신문사 기자가 내게 전화를 해서 딸의 수상에 대해 이야기하길래, ‘당신 가짜 뉴스 보고 그런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기사가 떴다고 그러더라고. 굉장히 당황했지. 딸이 그러더만. 이 상은 후보작을 결정해 놓고 정하는 상이 아니라고. 수상자한테도 발표 직전에 통보한 거야. 딸이 통보받은 게 저녁 7시50분.“ 한 작가는 “딸이 통보를 받았지만, 기대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대책도 없어 당황했겠죠”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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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군 안양면 한승원 작가의 집필실에 걸린 가족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딸 한강.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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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는 이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돼지를 잡아 마을잔치를 열려고 했다가 취소했다. 한강 작가가 “지금 세계 2곳(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축하 잔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장흥 회진 고향 마을에서 열려던 잔치도 취소했어. 딸이 완전히 ‘글로벌 지식인’이 됐어. 양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서 사람이 쓰러지고 있는데, (노벨문학상 수상을) 즐겨서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나는 (잔치를) 하고 싶은데.”



한 작가는 1970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기찻길 옆 블록집에서 딸을 얻었다. 그는 아들과 딸의 이름을 모두 ‘크게’ 지었다. 한 작가는 “큰아들은 ‘한국인’이고, 딸은 한국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으로 지었다. 장남은 이름 때문에 고생하다가 개명했다. 어렸을 때 강이를 한강, 낙동강, 대동강이라고 놀렸다더라”고 덧붙였다. 한 작가가 한번은 제 방에 누워있던 딸에게 “너 거기서 뭐 하고 있니?”라고 물었더니, 딸은 “공상이요! 왜요, 공상하면 안 돼요?”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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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한승원 작가 집필실 해산토굴.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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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항쟁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소설적 영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강 작가에게 1980년 5·18은 ‘폭력’을 알려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 작가는 “그때(1980년 5월) 초등학교 4학년 막 (서울로) 이사 왔을 때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아이들한테 이야기 안 했지. (만약 들었다면) 당시 광주에서 온 외가 친척들이 (5·18) 이야기를 한 것을 들었겠지”라고 회고했다.





“저항소설로 접근하기보다 함께 아파한 소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광주는 들썩였다. 고립된 섬 같았던 광주의 오월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 때문이었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과) “기적이다. 문학과 예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한강 작가가 가장 고통받은 존재들의 고통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귀 기울여 온 것을 세계 문학계가 높이 평가한 것이다. 5·18도 한강과 함께 세계인들이 공감하고 아파하는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한강 작가가 4·3, 5·18 등 국가폭력 문제를 저항소설로 접근하지 않은 점을 한 작가는 높게 평가했다. 한 작가는 “딸이 5·18을 소재로 고발·저항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사람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그대로 슬프게 그리려 인간의 실존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지. (이젠 그 트라우마를) 함께 아파해야지”라고 덧붙였다. “견뎌내야 하는 트라우마에다가 인간 실존의 문제를 표현했으니까, 강의 소설을 (수상작으로) 선택했겠지. 우리 세대 작가들하고 강의 세대의 작가들이 소설을 쓰는 시각 자체가 깊이가 다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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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 ‘해산토굴’에서 만난 한승원 작가.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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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한승원 작가의 집필실 해산토굴에 가을빛이 쏟아지고 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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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에게 장흥은 ‘제2의 고향’이다. 한 작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있으니까 그러지. 원적은 장흥 회진면이지만, 호적은 편리하게 하려고 서울로 올렸다”고 했다. 한 작가는 1997년 고향인 전남 장흥에 집필실을 짓고, 28년째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한강 작가는 2022년 장흥에서 열린 청년문학제에 참석해 아버지 한 작가와 문인, 청년 문학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강 작가의 아버지 고향인 장흥은 문향이다. 소설가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 등이 장흥 출신이다. 한 작가는 “(장흥이 소설가가 많이 나온 이유는) 역사를 더듬어 보면 민중들의 삶과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19세기 중순부터 장흥은 수탈을 많이 받은 땅이어서 동학의 세력이 컸고, 동학농민혁명 때 석대들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공간이다. 한 작가는 “동학 후예들의 뿌리가 뽑혀 버린 곳에서 개화는 빨랐다. 저항적인 인물이 많았는데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해 좌절됐고, 그 좌절이 문학 쪽으로 많이 나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39년 장흥 태생인 한승원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목선’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로서 활동했다. 고향 장흥에서 3년 동안 김 양식을 한 경험을 살린 작품이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산 가는 길’ 등 많은 작품을 썼던 그는 1980년 ‘구름의 벽’으로 한국소설문학상 받았으며, 이후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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