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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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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영화 ‘보통의 가족’. 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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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낸다는 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일까? 살아남는다는 뜻은 아닐까?



얼마 전 아이가 초등 저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엄마 둘과 오랜만에 밥을 먹었다. 무더운 여름 어떻게 보냈냐고 근황 체크를 하다가 교과서에 나오는 질풍노도란 비유가 아니라 팩트란 걸 확인했다. 한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가 찬 공을 맞고 앰뷸런스에 실려 가 방학 내내 평생 남을 수 있는 심각한 후유증의 공포와 보내야 했고, 한 아이는 친구의 장난으로 피해를 봤다가 사소한 언쟁에 우연히 상대 부모가 개입하면서 학폭 사태에 휘말리는 악몽 같은 경험을 했다. 내 아이 역시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다음에 소상히 밝히기로 한다. 과연 살아남았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질풍노도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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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두번째 친구의 이야기가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드라마처럼 황당무계하고 섬뜩한 스토리이기도 했다. 요지는 우리는 내 아이가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를 전전긍긍하지만 가해자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내 아이의 피해자 서사가 아닌 가해자 서사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다는 게 꽤 흥미롭게 읽힌다. 최근 개봉한 영화 ‘보통의 가족’은 고등학생 아이가 어른 몰래 술을 먹고 노숙자와 시비가 붙었다가 폭력을 휘둘러 노숙자를 혼수상태에 놓이게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부모가 겪는 심리 변화를 다룬다. 볼 때마다 집에 불 좀 켜고 살았으면 싶은 티브이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아직 초반이라 사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청소년 딸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의심하는 경찰 아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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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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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맞고 집에 돌아오느니 차라리 때리고 와라’라는 말을 버젓이 듣고 자란 우리 세대는 사실 가해자 서사에 일정 부분 둔감할 수밖에 없다. 늘 피해자가 될까봐 걱정하고 피해자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한다. 이렇게 교육받고 자라다 보니 귀하디 귀한 내 자식,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내 자식이 가해자가 될 리 없다는 생각을 손쉽게 한다. 피해를 당하는 것에 대한 주의만 줄 뿐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한 경고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죽음을 생각하는데 가해자는 ‘진심으로’ 장난이었다는 학교 폭력의 클리셰가 이렇게 탄생한다.



‘보통의 가족’과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두 아빠는 보는 이에게 감정의 이입을 끌어내면서도 불편하게 하는, 전에 없던 인물들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엄마라면 좋았을 텐데 여전히 엄마는 자식을 무조건 믿어주는 존재로만 그리는 건 나처럼 못된 엄마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여튼, ‘보통의 가족’ 재규는 자식의 범죄를 알아차렸을 때 처음에는 자식을 감싸려고만 하는 아내를 비난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듯하지만 서서히 변해간다. 왜 아니겠나. 그 누가 범죄를 저지른 내 자식 손을 잡고 성큼 경찰서로 갈 수 있을까? 정의도 진실도 남을 심판할 때나 빛나지 가해자가 된 내 자식의 이야기가 되면 그만큼 직면하기 고통스러운 말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태수는 더 곤혹스러운 지경이다. 모든 정황이 자신의 딸을 범인으로 가리키는 데 부모는 자식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 부모 자식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이라는 불변의 진리 사이에서 진퇴양난이다. 그의 심증과 달리 딸이 범인이 아니라면 태수는 딸에게 ‘영원한 배신자’가 되어 부녀 관계는 회복불능의 파탄이 날 것이다. 재규와 태수가 처한 상황은 부모로서 ‘만약’이라는 말로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최악의 악몽과도 같다.



부모는 내 아이에 대한 믿음을 지키면서, 때로는 아이를 의심해야 하는 이율배반의 칼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칼 끝의 삶은 난이도 극상이고 사실 대부분의 부모가 한편으로 내려와 있다. 위에서 말한 아들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피해를 입었다가 영화 ‘대학살의 신’과 비교할 수 없는 대환장파티를 만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학폭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자신의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상대 부모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 아이를 피해자의 위치로 만들어 놓았고, 그 굳건한 믿음 앞에서 장시간 고문 당하던 담당 교사는 합리적 해결책을 포기한 채 “00 어머니가 참아주시면 안 되겠냐”는 간곡한 호소로 그저 목소리가 더 높지 않았던 부모를 주저 앉히는 식으로 일이 마무리됐다.



사춘기 아이와 매일 지지고 볶으며 무심한 날들이 흘러가지만 문득 질풍노도의 한 가운데서 식은 땀이 날 때가 종종 있다.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닐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내 아이가 괴롭히는 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정말 믿고 싶지 않은 건 이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로 산다는 건 태수처럼 이 칼 끝의 삶을 매일 살 수는 없어도 때로 힘들게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이 엄청난 투쟁에서 스스로가 건 최면에 지지 않기를, 아이에 대한 믿음을 이어갈 수 있기를, 그 어려운 ‘오늘도 무사히’ 기도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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