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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광화문에서/이은택]‘악뮤’가 학교를 다녔다면 한강을 울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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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은택 사회부 차장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이후에 우리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별일 텐데.’ 이 노래를 발표한 2019년 당시 남매 그룹 악동뮤지션(악뮤)의 오빠 이찬혁은 23세, 동생 이수현은 20세였다. 사랑, 이별, 죽음을 몇 바퀴는 경험했을 중장년도 아닌, 갓 20대 문턱에 선 남매의 손끝에서 나온 문장이라는 사실이 서늘했다.

이 노래로 노벨 문학상 작가 한강을 울린 악뮤는 학교를 다닌 기간이 짧았다. 남매는 초등학생 때 선교사 부모님을 따라 몽골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정규 학교를 안 다니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가장 큰 이유는 “밥에 간장을 비벼 먹고 스키니진 한 벌 맘대로 사기 어려운” 가계 상황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환경 덕분에 악뮤의 천재성은 만개했다. 악보도 쓸 줄 몰랐지만 오빠가 콧노래를 부르면 동생은 멜로디로 만들었고, 밥공기 위에서 줄줄 흐르는 계란프라이를 노래로 만들었다(‘후라이의 꿈’). 0교시부터 보충수업까지 이어지는 수업 시간표 대신에 자율이 주어졌고, 학교가 정한 교과서 대신에 원하는 소설책을 잡을 수 있었다. 남매의 부모는 홈스쿨링 초반에 학교처럼 수업 시간표를 만들어 놓고 집에서 몇 번 해봤다가 나중에 찢어버렸다고 한다. 대신 아이들이 고드름을 보면서 글을 쓰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면 일부러 “정말 잘한다”고 과장하듯 칭찬했고 그게 신이 나서 더 하더라고 회상했다.

한강 역시 부친 한승원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어렸을 때 혼자 방에 누워 공상과 몽상을 즐겼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어디 갔는지 찾아보면 혼자 자기 방에 누워 ‘멍 때리고’ 있는 때가 많았다. 뭐 하냐 물으면 “공상을 해요”라고 했단다. 조급한 요즘 부모들 같았으면 아이가 사교성이 부족하다며 놀이학원이나 태권도장이라도 끌고 갔을 법한데, 부친은 “일어나 공부해라”, “나가서 좀 놀아라” 채근한 적이 없었다. 대신 자기의 본업인 글쓰기를 했고 딸은 이를 지켜보며 자랐다.

한강과 악뮤. 이 둘을 ‘천재’ 따위 수식어로 묶는 건 좀 얄팍하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환경과 마음껏 고민하고 공상하고 도전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이 만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환호를 보내는 동시에 초조한 모습이다. 벌써 제2의 한강을 배출해야 한다, 제2의 악뮤로 만들어야 한다며 분주하다. 학원가에는 ‘한강처럼 글쓰기’, ‘한강 독서 스터디’ 광고가 내걸렸고, 학부모들은 글쓰기 교실을 수소문 중이다. 서점 매대에는 ‘한강처럼 아이 키우기’ 등 책이 조만간 깔릴지 모른다. 모든 위대한 사람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공부법과 교육법으로 치환하고, 결국엔 사교육으로 환원시키는 이 나라의 고질병이 또 도질 모양새다.

노벨상은 세계 1등에게 주는 상이 아니다. 굳이 따지면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고, 공감하고, 실패하면서도 다시 시도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제2의 한강, 제2의 악뮤는 나올 필요 없고 나올 수도 없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데 굳이 ‘제2의 누구’를 배출해야 할까. 아이에게 주어진 기질을 믿고 키워 주다 보면 언젠간 그들 인생에 꽃을 피울 때가 오지 않을까. 굳이 그게 노벨상이 아니더라도.

이은택 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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