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18 (금)

감춰지고 가려졌던 근현대 여성 미술가 105명 [책&생각]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김보희 작가의 작품 ‘The Days’. ⓒ김보희, 나무연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그들도 있었다 1, 2
현대미술포럼 기획, 윤난지 등 지음 l 나무연필 l 1권 4만3000원, 2권 4만원



1970년대에 금성출판사에서 발간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에 소개된 여성 미술가는 4명이었다. 이후 1980년대에 증보한 ‘120인 선집’에는 5명의 여성이 포함됐다. 2000년대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에서 기획한 ‘한국현대미술가 100인’에는 12명의 여성 미술가가 수록됐다.



여성 미술가가 실제로 드물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성 미술가는 많았지만 재능있는 미술가는 드물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들도 있었다’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여성 연구자들로 이뤄진 현대미술가 연구 모임인 ‘현대미술포럼’이 이 질문을 붙들고 105명의 근현대 여성 미술가를 찾아냈다. 회화, 조각, 설치 등 미술의 전 영역을 탐색해 본 결과, 각 분야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여성 작가 수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책은 나혜석, 천경자 같은 유명 작가부터 요즘 엠지세대에게 인기가 많은 김보희 작가까지, 대중적 그림으로 사랑받았던 김점선 작가부터 전위적이고 전복적인 설치미술가 이불 작가까지 총망라한다.



한국에서 여성 미술가로 산다는 것은 한국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혼과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단절을 겪거나 드문드문 작품활동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특히 남편이 동료 예술가일 경우, 본인의 재능을 뒤로한 채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에 머물러야만 하기도 했다.



한겨레

강은엽 작가의 작품 ‘밤과 낮’. ⓒ 강은엽, 나무연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경성과 동경에서 교육을 받은 뒤 파리에서 수차례 살롱전에 입선하며 두각을 드러냈던 화가 백남순(1904∼1994)은 동료 미술가 임용련과 결혼한 뒤 예술가로서의 삶은 한풀 꺾였다. 부부는 함께 전시회를 열었지만, 평론은 그의 작품세계를 다루기보다 임용련의 아내로서만 대우했다. 7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육아와 내조에 전념하던 그는 60년대에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다시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인터뷰를 통해서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 세 가지를 꼽았는데, 그것은 파리에서 나혜석과 헤어진 것, 처음 품은 뜻을 굽히고 결혼한 것, 한국전쟁으로 남편과 자신의 작품을 모두 유실한 것이었다. 이 모두 여성 미술인으로서 예술 인생을 완주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뜻했다.



정찬영(1906∼1988)은 채색 화조화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전도유망한 작가였지만, 언론은 ‘규수 화가’로만 그를 대했다. ‘규수 화가’란 동양화를 기예로 삼는 기생 출신 화가가 아닌, 부유한 가문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자란 ‘참한’ 여성 화가를 말한다. 당대의 많은 평론가는 정찬영의 작품보다는 그의 용모, 말투, 태도를 상세히 전하고, 무엇보다 부인과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하며 ‘취미’에도 힘쓰는 규수 화가로 그를 집중 조명했다.



‘이응노의 아내’라는 역할에 가려진 박인경(1926∼) 역시 제대로 된 평가가 아쉬운 예술가다. 이화여대 미술학부를 제1회로 졸업한 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아이를 키우느라, 남편의 예술세계를 알리느라, 자신의 작품에 쏟을 여력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구순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화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특히 1967년 동백림 사건과 1977년 백건우·윤정희 납치 미수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박인경은 1980년대 중반부터 ‘글쓰기 회화’라는 자기만의 화풍을 구축한다. 이는 성경, 소설, 신문 기사 등을 1m 남짓한 화폭에 빼곡히 채워 넣음으로써 종이에 깊이를 불어넣는 수묵추상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담담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는 “그간도 혼자서 나를 위하여 그려왔기에” “열심히 그릴 것이다. 죽을 때까지”라고 말한다.



출산, 양육에도 쉼 없이 작품활동에 정진한 여성 작가도 있다. 박래현(1920∼1976)은 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여자 올림픽대회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고, 의사가 되고 싶어 동경여의전에 원서를 제출하는 등 원래 당찬 면모가 강했다. 중견 화가였던 김기창과 결혼한 뒤 총 14차례의 부부 전시회를 열었는데, 둘은 전시회를 통해 선의의 경쟁자이자 예술적 동반자임을 확실히 보여줬다. 박래현의 창작열은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계속됐으며, 남편과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한 뒤 늦은 나이에 7년간 뉴욕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그것도 완전히 새로운 매체인 판화를 선택해 공부했다. 결혼을 하든, 여행을 하든, 유학을 하든 그의 모든 인생의 선택은 예술로 향하는 길이었다.



한겨레

정강자 작가의 작품 ‘자화상’. ⓒ 정강자, 나무연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권운동의 선구자였던 나혜석의 조카인 나희균(1932∼)의 작품세계도 눈길을 끈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파리 유학까지 했지만, 결혼과 함께 10년간 네 자녀의 육아에 전념했던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입체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네온관과 피브이시(PVC) 파이프 등 산업 소재를 활용한 작품들이었는데, 이는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작품은 “여류 작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지적 실험의 독자성, 회화와 조각의 경계 영역을 극복한 공간적 조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책을 덮고 나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공간,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살아내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예술혼들이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남는다.



책은 기획부터 출간까지 5년의 세월이 걸렸다. 집필진은 작가들을 선정하고 자료를 찾아 연구하고, 원고를 집필한 뒤 논의하고, 도판을 선택해 수록허가를 받아냈다. 53명의 필진이 참여했지만 균질한 수준의 글쓰기를 선보인다. 생존 작가의 경우 인터뷰까지 담아 생생한 목소리를 살렸다. 미술학도뿐만 아니라 미술에 문외한인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게 쓰여졌다. 쉽지만 깊이 있는 해설이 탁월하다. 무엇보다 작가당 3점씩 실은 도판 덕분에 제대로 ‘눈호강’을 할 수 있다. 자기표현과 시대표현이 응축된 작품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풍요롭게 증거한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