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박준의 마음 쓰기] (13)
일러스트=유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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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비롯한 디지털 기기는 숫자 0과 1만으로 이진법 연산을 한다. 간결하게 비유하자면 전류가 흐르느냐 흐르지 않느냐를 예, 아니요로 답하는 세계다. 그런가 하면 기원전 2000여 년부터 약 9세기까지 중앙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했던 마야 문명에서는 이십진법을 썼다. 그들은 처음으로 숫자 0의 개념을 고안했고, 수학과 과학은 물론 천문학까지 수준 높은 발달을 이뤘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번성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육십진법을 썼다. 1분을 60초로 1시간을 60분으로 여기는 시간 셈법이 여기서 시작됐다.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십진법은 고대 이집트 문명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당시에는 숫자 대신 상형문자로 표기했는데 1은 막대기를 그은 듯하고 10은 고리를 닮았으며 100과 1000은 각각 물음표와 꽃을 닮았다. 어쩌면 십진법은 열 손가락을 가진 인간에게 가장 쉽고 직관적인 셈법일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혹은 덧셈과 뺄셈까지. 어린 시절 우리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수를 배웠다.
공학도 세계사도 수학도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앞선 이야기를 죽 늘어놓은 것은 순전히 며칠 전 우연히 본 전기밥솥 탓이다. 누군가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길가에 내놓은 전기밥솥.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0여 년 전 내가 쓰던 것과 정확히 같은 모델.
처음 자취(自炊)를 시작하며 나는 전기밥솥을 하나 장만했다. 한자 의미 그대로 자취는 스스로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는 일. 쌀을 물에 조금 불려뒀다가 깨끗이 씻은 다음 취사 버튼을 누르면 밥이 완성되는 단순한 과정이지만 내게는 그 시간이 무언가 뿌듯하면서도 고적하게 느껴졌다. 하나 단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빨리 밥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늦은 퇴근 후 허기로 가득한 날에는 이 시간이 마냥 길게만 느껴졌다.
유난히 할 일 없던 어느 날, 나는 작정하고 실제 시간과 전기밥솥의 액정 화면 시간을 비교해 본 적이 있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동안 나의 전기밥솥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던 것. 취사 버튼을 처음 누르면 38분 후 완료라는 글자가 화면에 뜨고 37, 36, 35, 숫자가 1씩 줄다 결국 종료 알람이 울리지만 실제로는 55분이나 걸렸다. 이후에도 쌀의 양과 불림 정도, 밥물의 온도를 달리해 몇 번 실험해봤으나 매번 전기밥솥의 시간보다는 오래 걸렸다.
취사 이후에는 보온 기능이 시작되는데 이것만큼은 오차 없이 흘렀다. 전날 저녁 일곱 시쯤 지은 밥을 다음 날 저녁 일곱 시쯤 먹을 때면 전기밥솥에는 으레 ‘24′라는 숫자가 표시되는 것. 한번은 긴 지방 출장을 다녀와 전기밥솥의 ‘3′이라는 숫자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내가 없는 사이 빈집에 들어와 밥을 해놓고 갈 사람이 없는데 누가 다녀간 것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솥을 열자 누렇게 말라버린 밥이 들어 있었다. 액정 화면의 숫자는 두 자리까지만 표시되니 99시간을 넘어 다시 0부터 세어진 것이었다.
어떤 밥을 먹느냐가 나의 삶을 단적으로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바쁜 날에는 밥은 먹는 게 아니라 때우는 게 된다. 물론 거를 수도 있다. 그러다 여유를 찾으면 따뜻한 밥을 지어 먹게 된다. 오늘의 밥은 오늘 짓고 내일 밥은 내일 짓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전화를 걸어 ‘밥 먹었어? 주말에 밥 먹자. 내가 맛있는 거 살게’ 하며 서로 밥시간을 포개어 보는 일도 바로 이때 시작된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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