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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1905년 1월 고종은 국가 이권 사업 23개를 일본인에게 넘기려 했다[박종인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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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국익 70%가 사라질 뻔한

’일한동지조합’ 사건

1905년 3월 14일 이세직(일명 이일직)이라는 사내가 대한제국 경성 시내에서 치안 방해 혐의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그런데 소지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서류들이 튀어나왔다. 고종 칙명 도장(勅命之寶·칙명지보)이 찍힌 ‘차관 도입 칙명서’ 7건, ‘일본에 망명 중인 을미사변 범인들 일망타진’ 칙명서, 그리고 ‘국가 이권 사업 특허 계약서’ 23건. 계약 당사자는 대한제국 궁내부 대신 이재극과 ‘일한동지조합’이라는 일본인 투자 집단. 토지조사사업부터 산업 단지와 항만 개발, 가스 회사 설립에서 염전 개발까지 ‘조선 국익 70%에 이르는’ 국책 사업을 일본인에게 넘기고 고종은 그 대가로 상납금 총 490만원과 매년 수익의 일정 비율을 받는 계약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예산이 1496만원이었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태학사, 2004, p159) 나라 예산 30%에 해당하는 이 거액을 국고가 아니라 본인이 상납받고 일본인에게 국가 이익을 통째로 넘기겠다? 황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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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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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측근 정치와 이세직의 서류 뭉치

이세직은 1894년 일본에서 홍종우를 사주해 김옥균을 암살한 고종 측근이다. 당시 일본 정부 수사 결과 이세직 수중에서 고종 옥새가 찍힌 암살 명령문이 나왔다. 고종은 모른다고 부인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이하 ‘기록’)4, 5-3-(11)-4. 김옥균 및 박영효 암살계획 혐의자 이일직 일파에 관한 건4) 일본에서 추방된 이세직은 ‘주상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임금 거소를 들락날락할 정도로’ 고종 총애를 받았다.(1898년 1월 18일 대한제국 관보. 김선주, ‘이세직의 활동을 통해 본 대한제국기 정치와 외교’, 역사와 현실 99호, 한국역사연구회, 2016, 재인용)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정부대신들을 불신하고 미천한 계층 인물들을 측근으로 중용해 비밀리에 정국을 운영했다. 이용익, 이세직, 김홍륙, 홍종우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일본공사관은 대놓고 ‘한 사람도 정당한 인물이 아니며 요사스런 마귀의 소굴’이라고 평가했다.(’기록’11, 5-1,2-(2)내각원과 총신 간의 알력) 이들이 고종과 은밀히 행한 정치로 인해, 훗날 을사조약 직후 자결한 민영환은 윤치호에게 “나라가 다 결딴났다”고 말했다.(1897년 2월 2일 ‘윤치호일기’) 그 결딴난 풍경을 적나라하게 담은 문서가 이세직이 가지고 있던 서류뭉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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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1905년 1월 15일 고종 칙명으로 대한제국 궁내부와 '일한동지조합'이 맺은 '토지조사사업' 특허권 계약서. 대한제국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토지를 찾아내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양여한다는 계약서다. 고종은 이 사업을 현금 100만원을 받고 이 조합에 넘기고, 조합은 매년 징수하는 세금의 40%를 수익으로 갖기로 계약을 맺었다./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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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利權) 23개, 국익의 70%

아래는 1905년 1월 15일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이 ‘일한동지조합(日韓同志組合)’이라는 일본인 단체와 계약을 맺은 특허권 목록이다. 이 조합은 많게는 100만원, 적게는 5만원까지 상납금을 황제에게 납입하고, 15년 동안 각 사업 수익을 황실과 나눠 갖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황실-조합 이익 배분은 2대8에서 6대4까지다. 계약 주체는 고종 8촌인 궁내부 대신 이재극과 ‘일한동지조합’ 대표들이다. 칙령과 계약서는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에 영인돼 있고, 누구나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다. 길지만 모두 인용한다. 모든 사업은 ‘특허권’, 그러니까 독점 사업권이다.

1. 탁지부 장부에 빠진 토지[隱結·은결] 조사정리사업권 2. 연강·연해 매립사업권 3. 연강·연해 제방 수축 및 전답 관리권 4. 연해·연강 요지 권업장 설립 및 운반권 5. 기타 연해·연강 매립에 관한 사업 일체 6. 각 도시 및 항구 가스 회사 설립권 7. 수력을 이용한 공업행사권 8. 적지(適地) 양어권(養魚權) 9. 각 지방 표고버섯 재배 및 판매권 10. 담배 증식권 11. 염전 증식권 12. 구 목장 재흥권(再興權) 13. 습지 전답 조성권

2주일 뒤인 1월 29일 대한제국과 일한동지조합은 추가로 10개 이권에 대해 계약을 맺었다. 조건은 동일했다.

1. 황실 소유 석유 전매권 2. 제주도 관유(官有) 목장 확장권 3. 전 항구 지역 항만[船渠·선거] 확장설치권 4. 설탕 전매권 5. 온천 및 냉천 개발사업권 6. 모범 농장 적지 설립 및 종자 개량, 비료 제조, 농기구 개량권 7. 제주도 장뇌 제조 전매권 8. 탁지부 장부에 빠진 토지[隱結·은결] 일반 역둔토 조사정리사업권 9. 소금 전매권 10. 담배 전매권.

같은 날 고종은 각 특허권에 대한 상납금을 완납하면 그 10%를, 매년 황실에 납입하는 수익금의 10%를 조합 대표에게 준다는 칙명을 내렸다.(‘기록’25, 6-(5)이익금의 100분의 10을 일한동지조합 대표에게 지불한다는 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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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1905년 1월 17일(15일의 오기로 보인다) 대한제국이 ‘일한동지조합’과 맺은 이권 특허 13건에 이어 1월 29일 별도 10건에 대해 이권 사업 특허권을 주겠다는 추가 계약서. 대한제국이 ‘일한동지조합’에게 넘기기로 계약한 국가 이권사업은 모두 23건이었다. /국사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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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개발 및 징세, 항구 개발, 산업단지 개발, 농산물과 양식, 각종 전매사업이 총망라돼 있다. 23건 계약으로 고종이 받기로 약정한 상납금 총액은 490만원이었다. 특히 수익이 큰 토지조사사업 상납금은 50만~100만원으로 최대였다.

‘일한동지조합’ 대표인 모리베 도라주(毛利部寅壽·인주, 도라히사로도 읽는다)는 주한일본 영사에게 이렇게 서면 진술했다. “다 합쳐보니 한국 13도 중 대략 10분의 7은 ‘일본국’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기록’26, 1-잡(雜)1~3-(2)일한동지조합 대표 모리베 도라주의 국내 사업 특허 전말과 경위 해명) 로비 자금을 비롯해 이들이 투입한 경비는 2만엔으로, 이 돈은 ‘이퀴터블(Equitable)’이라는 미국 보험회사에서 투자했다.(‘기록’25, 10-(17)모리베 등이 받은 특허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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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1904년 12월 13일 고종이 측근 이세직에게 내린 밀칙. 일본에 망명한 을미사변 주범들을 일망타진하라는 명령서다./국사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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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국사범 박멸

이권 계약보다 한 달 전인 1904년 12월 13일 고종은 이세직에게 두 가지 칙명을 내렸다. 첫째, 일본으로 망명한 을미사변 주범들을 일망타진하고 역모의 간담이 싹트기 전에 파멸시키라.’(사진3·'주한일본공사관기록’25, 6-(1)도일 망명자 처리에 대한 대한제국황제의 밀칙) 이를 위해 일본 정부 및 경성주차 일본군 사령부 내 비밀을 탐지할 각국 인사 10명을 포섭하고 이들에게 선수금 5만원, 상금 50만원을 지급하라.(사진4·'기록’25, 6-(13), (14))

1884년 갑신정변 이래 고종은 일본에 망명한 국사범 처단에 몰두했다. 지운영(지석영 형)을 보내 김옥균 암살을 시도했고 이세직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고 박영효 암살을 시도했다. 을미사변 이후에는 또 다른 측근 고영근이 망명한 우범선을 암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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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1904년 12월 13일 고종이 이세직에게 내린 기밀 탐지 성공보수 밀칙. 착수금 5만원과 성공보수 50만원을 기밀 탐지자에게 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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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종은 이세직에게 잔당 처리 밀명을 또 내렸다. 이를 위해 경성과 도쿄 두 군데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각 5명을 포섭해 일을 처리하라는 추가 지시도 함께 하달했다.

둘째, 같은 날부터 이듬해 2월 6일 사이 고종은 이세직에게 50만원에서 2만원까지 7건에 이르는 차관 도입 밀칙도 내렸다.(사진5·'기록’25, 6-(6)~(12)) 밀칙에는 ‘외채를 차입하여 황실의 수용에 공급하고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 즉시 상환’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돈줄이 끊긴 상태였다.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1차한일협약’에 의해 탁지부 고문으로 임명된 일본 대장성 소속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황제가 영수증 없이 쓰던 황실 내탕금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차관 밀칙은 이 통제를 벗어나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종이 내린 명령으로 추정된다. 압수된 칙령을 포함해 고종이 이세직에게 명한 차관 총액은 2642만원으로 그해 예산 두 배에 가까웠다.(김선주, 앞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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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1904년 12월 13일 고종이 이세직에게 내린 차관 도입 밀칙 가운데 하나. 50만원 규모 차관을 도입하라는 명령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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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계를 휩쓴 로비

문서를 접한 일본 측은 일한동지조합 대표인 모리베 도라주를 조사했다. 모리베는 “도쿄에서 여러 제현과 상의해 동의를 얻었다”며 “망명자 처분 서류 따위는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기록’26, 10-잡1~3-(2)) 모리베가 언급한 ‘여러 제현’은 거물들이다. 이토 히로부미, 전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전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역시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등.

이세직 체포 한 달 뒤인 4월 14일 가토 다카아키가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선처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다. 같은 날 오쿠마 시게노부도 편지를 보냈다. “시정 방침에 어긋나지 않는 한 부디 편의를 주시기 바란다.” 편지에는 현직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이름도 언급돼 있었다.(‘기록’26, 10-잡1~3-(3)毛利部의 방한 설명에 선처 요청, (5)伊藤博文·桂太郞·小村壽太郞의 동감과 동 사업 승인 요망)

일본이 취소시킨 계약

일본 정부 공식 입장은 달랐다. 로비를 받았던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는 6월 27일 주한공사 하야시에게 공문을 보냈다. “한국 경영에 관해서는 정부에서 일정한 방침을 가지고 실행을 기하고 있음. 이 사업을 허용하게 되면 대한(對韓) 경영은 근저부터 파괴돼 유명무실로 돌아갈 것임.”(‘기록’25, 10-(15)모리베 등이 획득한 양여에 관한 선후 처분의 건) 병합 후 일본 정부가 통제해야 할 대한제국 이권 사업을 민간에 허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완전히 종속된 대한제국

7월 11일 일본은 대한제국 외무대신에게 사건 해명과 ‘조약 이행 각서’를 요구했다. 1904년 8월 체결된 1차한일협약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처리에 관해서는 미리 일본 정부와 토의할 것.’ 7월 17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이세직이 외국인과 사통해 나라 간 관계를 손상시켰다”며 “협약을 마땅히 준수해 영원 불변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이틀 뒤 관보에 발표했다.(1905년 7월 17일 ‘고종실록’, 7월 19일 ‘관보’) 관보를 확인한 주한공사 하야시가 본국에 보고했다. ‘이리하여 일한협약서(日韓協約書)의 효력은 실제적으로 강화됐음.’(‘기록’26, 1-1~4-(181) 이세직의 이권 문제와 일한협약서 효력 강화 건) 4개월이 지난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이세직은 태형 100대와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다. 1906년 8월 고종은 유배 중인 이세직을 방축향리(고향으로 돌려보냄)형으로 감형했다.(1906년 8월 20일 ‘황성신문’) 을사조약으로 조선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이렇게 말했다. “이세직 사면 같은 일은 사법대신 상주를 얻어 국가 원수가 이를 행하는 것인데 귀국에서는 갑자기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다.”(‘통감부문서’1, 6-1~3-(11) 한국의 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 제11회 회의록)

1905년 1월 7일 위정척사파 최익현이 고종 면전에서 통곡하며 말했다. “삼천리강토가 일본에 의해 망할지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란 반드시 자기가 자신을 멸시한 다음에야 남이 멸시하는 법이니 어찌 전적으로 저들에게만 죄를 돌리겠는가.”(1905년 1월 7일 ‘고종실록’) 1차 이권 양도 계약 체결 8일 전이었다. 고종, 식은땀이 흐르고 소름이 끼쳤으리라.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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