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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책의 향기]네 개의 열쇠로 한강을 건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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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의 한강 가이드

동아일보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강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목소리가 뒤섞이고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복잡한 형태를 띤다. 시적 문체로 가득한 한강 작품을 읽는 네 가지 키워드를 안내한다.

첫째, 폭력성이다. 한강 소설은 우선 세계의 무참한 폭력에 대한 증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 미만한 아버지의 폭력, 제주4·3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압축되는 역사의 폭력이 작품 곳곳에 나타난다. ‘여수의 사랑’에 실린 데뷔작 ‘붉은 닻’에서 이미 아버지는 “두려운 사람” “경멸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이상스러운 존재”로 나타난다. ‘채식주의자’에서 우리는 오토바이에 개를 매달고 동네를 질주하는 아버지,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고기를 쑤셔 넣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 폭력성의 절정을 마주친다.

두 번째는 상처다.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는 모두 끔찍한 마음과 몸의 병을 앓고, 흉터를 얻는다. 초기 대표작 ‘그대의 차가운 손’에 나오는 두 여성 L과 E의 몸에도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흉터가 있다. L은 폭식으로 살을 덧댐으로써 성폭행으로 상처받은 몸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손만은 생기 넘치고 아름답다. 반대로 E는 얼굴과 몸매에 집착한다. 육손이로 태어난 그녀는 수술받아 흉해진 손을 가리려 주먹을 움켜쥔 채 살아간다.

단단한 껍데기를 씌워 상처를 가리려는 두 사람의 삶은 갈수록 공허해진다. 진실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흉터는 오히려 인생의 훈장이다. 상처는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에서 한강은 말한다. “견디는 힘이란 따로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몸의 일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셋째, 어둠 속에서 홀로 우는 여자다.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에서 한강은 한밤중에 몰래 소리 죽여 우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가부장 사회가 강요하는 비극적 삶은 여성에게 흐느끼는 울음의 언어를 강요한다. 말을 빼앗긴 이 여성의 초상은 한강 작품에서 거듭 모습을 드러낸다. ‘채식주의자’의 영혜, ‘희랍어 시간’의 실어증에 걸린 여자 등은 모두 그 변주다. 한밤중에 우는 여성에게 한강은 속삭인다. “고통이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흰’에서)

넷째, 주광성이다. 폭력이 지배하는 삶엔 희망도,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은 사슴’에서 한강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향해 구부러지는 식물적 삶의 형태를 발명한다. “어두운 방에 놓인 화분 속 풀이, 아무리 가냘픈 빛이라도 있으면 그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인간은 희망이란 존재를 상상하고 추구하는 것만으로 강해진다. 이 식물성은 ‘채식주의자’를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폭력의 세계에 대한 저항의 미학으로 발전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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