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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인지도가 곧 실력?…집 앞에 병원 있어도 서울 가는 이유[난임상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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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정보 부족이 일으킨 '서울 큰 병원은 다르다'는 믿음

편집자주합계 출산율 0.72명 시대. 서울의 유명 난임 병원 앞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섰다. 동서고금 유례없는 저출산 추세가 무색할 정도다. 지난해 전국 난임 환자는 25만명. 모든 의료 인프라가 서울로 집중된 현실 속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원정 치료'를 떠나는 지방 난임 부부들은 오늘도 고통받는다. 치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지역 간 의료 불평등이 임신, 출산을 간절히 바라는 난임 부부들의 앞길을 막는다. 저출산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갖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지방 난임 부부의 원정 치료 실태를 들여다본다.
"이름이 잘 알려진 '메이저 병원'으로 바로 가는 게 나은 선택이다 싶었어요. 난임병원 가서 체외수정(시험관) 시술을 하는 건 임신이 목표잖아요. 괜히 지방에서 한두 번 해보고 마음고생, 몸 고생하느니 처음부터 확률을 높이기 위해 서울로 가기로 했어요. 지인 대부분이 지방 병원을 다니다가 전원하더라고요."

강원도 내 지역 인구가 5000명도 채 되지 않은 한 읍내에 거주 중인 박주현 씨(가명·40)는 서울에서 시험관 시술을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결혼 4년 차인 그는 지난해 1월부터 시험관 시술을 진행했다. 13년 차 직장인으로 올해는 시험관 시술을 위해 휴직까지 감행했다. 1년간 회사에 다니며 진행하다 보니 체력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그나마 집과 가까운 지역 난임병원은 원주에 있는데 그마저도 차로 1시간 걸리는 거리라 '실력 좋은' 서울로 가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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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난임 부부들이 난임 치료를 위해 상경을 택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임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다. 전문가들은 난임 시술의 성패가 시간과의 싸움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남녀 모두 나이가 가임력에 큰 영향을 준다는 분석 결과 때문이다. 지역에 실력 좋은 병원이 있다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지만, 마음이 급한 환자들은 '서울 병원의 임신 성공률이 더 높다'는 인식에 흔들린다. 국내 대표 난임 병원으로 손꼽히는 마리아병원, 차병원 등 수십명의 난임 전문의를 보유한 인지도 높은 대형 병원은 주로 수도권에 거점을 둔다. 임신 성공률을 공식 확인할 수 있는 창구가 없지만, 입소문을 듣고 이른바 '메이저 병원'으로 향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원에서 전국 수석이 나올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사람이 많이 몰려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장 마음이 급하다 보니 그런 것에 기댈 수밖에 없더라고요. 지방 병원에서 성공했다는 사람은 딱 한 명인데 메이저 병원에서는 성공한 사례를 여럿 보게 되잖아요. 이왕이면 확률 높은 곳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온라인 경험담에 의존…인지도 높은 병원 찾는다
정보 부족은 난임부부의 수도권 쏠림 현상을 부추긴다. 난임 부부들은 병원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블로그, 카페, 유튜브, 지인 등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인지도가 있는 대형 병원은 많은 환자들의 경험치를 담아 온라인에 의료진의 특성이나 주로 사용하는 시술 방법 등 각종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병원을 찾는 환자들과의 접점이 넓을 수 밖에 없다. 반면 환자가 적은 지방 병원은 온라인 경험담마저 구하기 어렵다.

결혼 2년 차인 제주도민 최윤지 씨(32)는 지난 4월 한차례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를 갖게 된 6개월 차 임산부다. 이동 부담 때문에 제주에서 먼저 치료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제주 내에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을 모두 진행할 수 있는 병원이 단 한 곳뿐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지역이어도 집에서 병원까지 왕복 3시간 거리였다. 윤지 씨는 지역 맘카페를 정기적으로 들어가며 정보를 얻으려 했다고 한다. 제주에 난임병원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 누군가가 시나 보건소 등에 문의해 관련 정보를 얻어 공유했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전원할 서울 병원도 함께 알아봤다.

"처음에는 정보 찾기도 힘들었어요. 포털 검색이나 지역 카페 검색에 의존했죠. 지방 병원에서 진료받는 사람은 아무래도 병원의 기술력이나 장비 최신화 등에 대한 우려가 있어요. 병원이 불만족스러워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괜히 지방에서 허송세월하다가 적기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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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21년 난임 시술 여성 6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난임 전문 의료기관 선택 시 관련 정보를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80% 이상이 인터넷 또는 지인을 언급했다. 평소 난임 시술 관련한 정보도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 등 온라인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는 응답률이 월등히 높았다.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인지도가 곧 실력으로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만난 지방 난임 부부들은 병원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인지도 높은 병원이 시험관 시술을 통해 임신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배아 배양 기술 측면에서 뛰어나다고 강하게 믿었다.

실제 복수의 난임 전문의에 대형 병원과 지방 병원의 배아 배양 기술 차가 크냐고 문의하니 의사마다 생각차가 존재했다. 대형 병원의 한 전문의는 "배양 기술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연간 일정 횟수 이상의 시술을 진행하는 병원이라면 임신 성공률이 비슷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내놨다. 또 다른 전문의는 배아 배양 경험이 많은 의료진과 연구실 직원이 있을수록 기술력 차이는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국내 난임센터 임신 성공률은 평균 25~30%이나 센터별로는 20~65%로 상당히 차이가 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의료진마저도 엇갈린 의견을 내놓는 상황에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한 난임 부부는 배양 기술이 좋다고 알려진 인지도 높은 병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병원 찾아 서울 갔지만…분만도 '고민거리'
서울의 난임 병원을 찾은 지방 부부들은 임신에 성공하면 분만 병원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달 무거워지는 몸을 이끌고 서울에서 진료 보기 어려운 데다 먼 타지에 병원을 두고 갑작스럽게 터지는 분만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난임 시술로 임신한 여성의 경우 고령, 다태아 임신 등 고위험 산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분만 병원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고민이 깊다. 분만 병원이 부족한 지역에 머무는 난임 여성은 관련 정보를 구하는 미션을 받게 된다. 그럴 때면 결국 지방의 메이저 병원이라 할 수 있는 대학병원으로 향하게 된다.

올해 출산을 앞둔 윤지 씨도,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며 난임 치료 중인 주현 씨도 기자에게 분만 병원 고민을 털어놨다. 윤지 씨는 "육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선택권이 적다. 지금도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다니고 있다"면서 "고위험 산모 판정을 받는다면 제주대병원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주현 씨는 지난해 하혈로 급히 인근 도시의 유일한 산부인과를 갔으나 열악한 시설과 미흡한 처치에 크게 실망했다고 경험담을 털어놨다. "실제 분만할 상황을 생각하면 겁나더라고요. 분만은 언제 갑자기 터질지 모르는 거잖아요. 전문의가 1명인 분만 병원은 차마 겁나서 안 되겠더라고요. 전문의가 적어도 2명 이상인 곳으로 가야겠다 싶었죠. 노산이다 보니 결국 선택지는 대학병원뿐인가 싶기도 하고요."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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