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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월)

[연재] 태고의 타임캡슐 '괴베클리 테페'의 메시지를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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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아시아투데이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괴베클리 테페는 오늘날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방 남동부에 위치하는 거석(巨石, megalithic) 유적지다. 고고학자들의 탄소연대 측정에 따르면, 이곳은 기원전 9600년에 형성되어서 기원전 8200년까지 사용되었다. 스톤헨지나 기자 피라미드보다 무려 7000 년 앞선다. 이 거대한 유적지가 1만2600년간이나 소문도, 흔적도 없이 땅속에 묻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기원전 8200년경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은 그곳을 흙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라 추정한다. 그 점에서 괴베클리 테페는 태고의 수렵인들이 뭔가 중대하고 절실한 메시지를 후대에 알려주기 위해 만든 태고의 타임캡슐로 보인다.

◇ 일반론을 뒤엎는 땅속의 유물들

1996년부터 2014년까지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을 도맡았던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 1953~2014)는 그 근처 도시 우르파(Urfa)에 집을 사서 이주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학의 일반론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세계사적 중요성이 있음을 확신했음일까? 한 치의 과장도 없이 괴베클리 테페의 등장은 역사가들은 기존의 세계사 교과서를 버리고 새로 쓰게 하는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첫째, 농경과 문명의 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지금껏 널리 수용된 역사학의 일반론에 따르면 1만1600년 전에 그곳에 그토록 거대한 구조물이 들어설 수 없다. 그 시기는 인류가 아직 문명의 문턱에도 못 이른 수렵채집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역사학자들은 농경의 발생 이후에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서 한곳에 눌러살게 되었다고 설명해 왔다. 발굴 현장 주변에서 토기, 수레, 농기구 등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신 거석 기둥에는 다양한 모양의 동물 문양들이 보인다. 그 모든 정보는 그들이 수렵채집으로 살아갔음을 보여준다. 농경의 발생은 정착 생활의 결과였을 뿐 직접 원인은 아니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태고의 사냥꾼들이 대규모 군체(群體)를 이루고서 일정한 지대에 눌러살았고, 장기적 군체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본격적 실험을 통해서 농경을 터득했을 수도 있다.

둘째, 신석기 초기 이미 고도의 지식 체계가 성립돼 있었다고 여겨진다. 보통 10~20톤, 최대 50톤에 달하는 거대한 돌기둥들을 자유자재로 다룬 솜씨를 보면 그들은 지구인의 뇌리에 각인된 일반적 이미지의 원시인들이 아니다. 토기도 만들지 않은 채로 돌을 주로 사용하던, 이른바 '초기 선(先)토기 신석기(Pre-Pottery Neolithic, PPNA)'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수십 톤의 거석을 정교하게 깎는 석공 기술을 갖게 되었을까? 그 점에 대해선 어느 고고학자도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괴베클리 테페 D 구역(Enclosure D)의 배치는 4:3 비율의 타원형이다. 다른 구역도 거의 비슷한 비율의 타원형이다. 4:3의 비율은 기자 피라미드의 총설계도에서도 발견된다. 음향학자들은 4:3의 비율이 완전4도의 관계임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도(C) 음의 진동수가 파(F) 음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이 점에 착안해서 일부 학자들은 괴베클리 테페의 4:3 타원 구조가 고대의 음향학적 지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셋째, 문명 발생 훨씬 이전에도 이미 정교한 종교적 건축물이 지어졌다는 점이다. 세계사의 일반론에 따르면 보통이 문명 발생 이후 정치권력이 강화되고 공동의 종교적 질서가 확립될 때 기념비적 건축이 구축된다. 괴베클리 테페의 건축은 그러한 일반론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괴베클리 테페는 경제적 실용성과는 무관한 심오하고도 고차원적인 목적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명인'이 아니라 문명 이전의 수렵채집인들이 과연 왜, 어떻게 그토록 거대한 구조물을 구축했을까? 그 규모도 놀랍지만 수십 개 돌기둥에 새겨진 의미심장한 문양들은 무엇인가 간절한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신석기 초기에 막대한 인력과 재원을 투입하
여 그토록 장대한 규모의 대규모 구조물을 건축한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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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 'D 구역' 43번 기둥. 일명 '독수리 비석.'



◇ 신전인가? 천체 관측소인가?

최초의 발굴을 이끌었던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신전(神殿, temple)이나 성당(聖堂, cathedral)이라고 주장했다. 슈미트의 해석은 그 자체로 문명사의 일반론을 뒤흔드는 충격파를 던졌다. 역사가들은 농경의 발생으로 정착 생활을 하면서 지구인들 사이에서 공유된 종교적 관념이 생겨나서 종교적 복합 단지가 생겨났다고 믿어왔다. 슈미트의 해석이 옳다면, 괴베클리 테페는 농경 이전에 이미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도 종교적 활동이 성행했으며, 종교적 건축물이 제작됐음을 입증하는 스모킹 건(smoking gun)이라 할 수 있다.

슈미트의 해석과는 달리 괴베클리 테페를 고대의 천체 관측소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지난주 소개했던 영국 에든버러 대학(University of Edinburgh) 공대의 스웨트만(Martin B. Sweatman) 교수와 치크리시스(Dimitrios Tsikritsis) 박사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괴베클리 테페가 1만 2900년 전에서 1만 1700년 전까지 1200년 동안 진행됐던 '작은 빙하기' 영거 드라이아스(Younger Dryas)기를 일으킨 소행성과의 충돌 사건과 유관하다고 추정한다. 그들은 특히 'D 구역' 43번 기둥 독수리 비석(the vulture stone)이 기원전 1만951년과 1만950년에 펼쳐졌던 밤하늘 별자리라고 주장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근거해서 스웨트만 교수는 태양의 위치가 기원전 1만951년 추분에는 물고기자리(Pisces)에, 1만950년 동지에는 쌍둥이자리(Gemini)에, 1만950년 춘분에는 처녀자리(Virgo)에 놓여 있었음을 밝힌 후, 독수리 비석에 새겨진 여러 문양이 이에 상응하는 별자리 그림이라 주장한다. 실제의 비석에는 '물고기자리'가 날개를 접은 큰 독수리로, 쌍둥이자리는 아이벡스(산악 염소)로, 처녀자리는 개구리 문양으로 표현돼 있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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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先)토기 신석기시대 초기 아나톨리아 동남부 수렵채집인들이 건설한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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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천문학의 지식을 동원한 스웨트만의 해석은 매우 창의적이며 흥미롭지만, 고고학자들은 스웨트만 교수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선 그들은 영거 드라이아스기가 소행성과의 충돌로 발생했다는 가설 자체의 타당성을 의심한다. 물론 그 가능성을 전면 배제하진 않지만, 아직은 사실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지금껏 밝혀진 괴베클리 테페의 연도는 스웨트만 교수가 제시한 1만950년보다 700~1000년 정도 늦다는 점이다. 또한 태고의
사냥꾼들이 이후 문명인들이 인지했던 별자리를 그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창의적인 스웨트만의 천문학적 해석에 꼼꼼하고 깐깐한 고고학자들이 맞서고 있는 형국은 과학 발전의 변증법적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아직은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가 없다. 8.9㏊(9만 ㎡)에 달하는 괴베클리 테페는 이제 고작 5~10%밖에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토록 중대한 유적지가 5~10%밖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현재의 지구인들은 "지구인의 세계사"에 대해서 사실 아무것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구인의 역사 지식은 대개 그러하다. 학문의 종국은 무지의 자각이라 했던가? 지구인의 역사를 캐묻는 외계인 미도에게 지구인으로서 솔직하게 고백하려 한다. "미도님, 불과 1만2000여 년 전의 세계사에 대해서 지구인들은 거의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컴컴한 무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계속>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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