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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화)

[중앙시평] 시간은 윤 대통령의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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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위기? 무슨 위기?(Crisis? What crisis?)”

요즘 정국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반응을 보면서 떠오른 말이다. 원래 이 표현은 영국 노동당 총리 캘러헌을 향한 것이었다. 1978년 영국 사회는 인플레와 노조의 파업 등으로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른바 ‘불만의 겨울’이다. 그렇게 명명될 정도로 당시 상황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컸지만, 캘러헌 총리는 국민의 이런 불만과 어려움에 공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혼란(chaos)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둔감한 대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회의 내각불신임으로 이어졌고, 뒤이은 총선에서 노동당은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에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정책 난맥, 부인 논란에 민심 동요

대통령은 ‘무슨 위기?’ 팔짱만 껴

선거 치러야 하는 여당은 위기감

여당과 관계서 대통령은 이미 ‘을’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업무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가 20%대 초반까지 떨어진 데서 알 수 있듯이,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높다. 임기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딱 부러지게 풀어낸 정책이 없다. 의사들과의 다툼은 장기화하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안 보이고, 노동, 연금, 교육 등 약속했던 개혁 정책도 지지부진하다. 이런 상황에서 잇달아 터져 나오는 대통령 부인을 둘러싼 각종 논란은 안 그래도 불편한 민심에 불을 질렀다. 더 불편한 건 대통령의 안이함이다. 민심이 요동치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사안의 심각함을 공감하지 못한 채, ‘위기? 무슨 위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통령이 둔감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도 여당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팔짱 끼고 편히 지켜볼 수가 없다. 윤 대통령은 여당을 지원 조직 정도로 생각하고 당연히 자기를 지지하고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통령에 대한 여당의 협조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한번 당선되고 나면 그만이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거를 겪어야 하는 여당의 처지는 대통령과 다른 것이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국민의힘이 참패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면 그 결과는 오롯이 여당이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당은 정치적 위기 국면에 예민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 사람들은 듣기 싫은 소리에 대통령이 화를 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민심이 위험하게 출렁거리는데도 대통령이 안 움직이면 스스로 살기 위해서라도 여당은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어제 ‘마침내’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회동했다. 그동안 여당 대표와의 회동에 대한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서, 대통령이 여당 대표와 만나는 게 이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싶었다. 그 회동이 결정된 후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면서도 이게 이 정도로 주목받을 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양보해서 만나 준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 대통령-여당 관계에서 시간은 대통령의 편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여당은 임기 말을 향해 가는 대통령, 더욱이 인기 없는 대통령과는 차별화하려고 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여당 내에 친이-친박 간 갈등이 있었고, 여당 내 분열은 결국 이 대통령이 추진해 온 세종시 수정안의 좌절로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차기 주자로서 박근혜는 이 대통령과 차별되는 자신의 이미지를 분명히 했다.

상명하복의 위계적 조직에 익숙한 윤 대통령은, 한때 자신의 부하였던 여당 대표를 여전히 그렇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당의 도움을 절실하게 부탁해야 하는 건 오히려 대통령이다. 점점 더 여당은 대통령에 대한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겨우 8석의 근소한 의석으로 대통령 거부권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는 윤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이끌고 나가기 위해 제일 중요한 일이다. 대통령이 이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줄 수 있는 ‘선물’도 마땅치 않다. 공천 여부가 달려 있는 선거는 윤 대통령 임기 중에는 없고, 옛날처럼 정치 자금을 나눠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대통령이 여당에 낮은 자세로 먼저 다가서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 부인이 관련된 논란이라는 휘발성 높은 사안을 잡은 거대 야당의 공세는 앞으로도 더욱 강해지겠지만, 대통령을 정말 힘들게 할 수 있는 건 여당이 등을 돌릴 때이다. 대통령의 레임덕은 야당 때문이 아니라 여당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여당과의 소통과 협력은 대통령에게 중요하다. 특히나 여당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절박한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해결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위기? 무슨 위기?’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최고 정치 지도자의 둔감함은 노동당이 권력을 잃는 것으로 끝이 났다. 캘러헌도 총리 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 책임은 여당만이 홀로 지게 된다. 인정하기 싫더라도 여당과의 관계에서 대통령은 이미 ‘을’의 입장이 되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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