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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수)

‘군주제’ 반감에 와해되는 英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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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방문에도 호주 국민 무관심… 의회선 “내 왕 아니다” 항의까지

조선일보

영국 국왕 찰스 3세 부부가 호주에 도착한 지난 18일 시드니의 명물 오페라하우스의 지붕에 환영의 의미로 두 사람의 사진이 띄워졌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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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2년 만에 처음 호주를 방문한 영국 찰스 3세 국왕 부부가 예상보다 미적지근한 호주 국민의 반응에 진땀을 빼고 있다. 2011년 엘리자베스 2세 방문 이후 첫 영국 왕 방문인 데다 암 투병 중인 찰스로선 항암 치료도 중단하고 나선 오세아니아 순방길이지만, 호주 여론은 싸늘한 편이다. 영연방왕국(The Commonwealth Realm)에서 호주가 탈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의 맹주 지위를 위협받아온 영국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이후로는 영연방에 대한 마지막 구심력까지 잃어버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의 마지막 잔재인 영연방 왕국이 와해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순방은 공식 일정 시작 전부터 삐거덕거렸다. 국왕 부부 환영식에 초대받은 호주의 6개 주 대표 총리들은 다들 각자 일정이 있다며 모두 불참했다. 이를 두고 영국 내에선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일간 데일리미러는 “찰스가 호주 정치인들에게 뺨을 얻어맞는 것 같은 무시를 당했다”고 했다. 찰스는 21일 연설차 방문한 호주 의회에서 원주민 출신인 리디아 소프 상원의원에게 “당신은 내 왕이 아니다. 영국이 학살한 우리 사람들을 돌려달라”는 말도 들었다. 영국 왕을 국가 원수로 모시는 호주에서 이례적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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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소프 호주 상원의원이 21일(현지시각)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의회 리셉션에 영국 찰스 국왕과 카밀라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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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부를 맞이하는 호주 국민들 반응도 상반됐다. 영국 매체들은 호주 국민들이 이번 방문에 대해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찰스 부부의 방문을 계기로 “이젠 호주가 영연방 왕국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BBC는 “많은 호주인들은 왕실의 방문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면서 “호주에서 군주제 반대 세력들이 왕실 방문을 계기로 군주제에 대한 국민 반감을 부추기고 있다”고 했다.

호주뿐만 아니라 영연방 왕국에 소속됐던 회원국에선 최근 독립적인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 영국의 식민 지배 유산과 잔재를 떨쳐내자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높아지는 상황이다. 현재 영연방으로 등록된 회원국은 모두 56국이지만, 이 중 영국 이외의 캐나다·뉴질랜드·파푸아뉴기니 등 14국만이 영국 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는 영연방왕국 소속을 유지하고 있고, 대부분은 이미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호주는 작년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가 “호주는 호주인을 국가 원수로 가져야 한다”면서 법무장관 아래에 공화제 전담 차관직을 신설했다. 자메이카·세인트루시아·바하마 등도 공화국 전환을 논의 중이다.

영연방 왕국이 이처럼 흔들리는 것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면서 예견됐던 수순일 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20세기 중반 인도, 말레이시아, 가나 같은 굵직한 나라들이 영연방 왕국에서 잇따라 독립한 뒤에도 여태껏 영국 왕실이 영연방 내 지위를 유지해 온 것은 여왕 특유의 카리스마와 포용력이 영연방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어머니에 비해 영국 내 지지율도 낮은 찰스 3세가 영연방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붙들어 둘 수 있겠냐는 것이다.

2020년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영연방의 상징적 지도국으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리면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영국이 EU와 경제적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이후 영연방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실질적인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베이도스는 영국의 EU 탈퇴 직후인 2021년 영연방 왕실을 떠나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카리브해의 영연방 국가들은 영국 정부를 대상으로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오는 23일 영연방 정상회의에서는 신임 사무총장이 선출되는데 현재 후보자 3명 모두 노예제와 식민주의로 피해를 본 국가들에 대한 배상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영국 정부 반면 이번 순방 전에 노예제에 대해 사과나 배상할 계획이 없다고 이미 밝힌 상태이고, 찰스는 내각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노예제에 대해 사과할 수 없는 법 때문에 침묵하고 있다. 영국의 현 집권당인 보수당은 그동안 꾸준히 과거 식민지 국가들의 배상 요구를 강력히 거부하는 입장을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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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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