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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금)

[사유와 성찰]팔만대장경과 노벨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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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대한민국의 작가 한강이 선정됐다는 보도에 온 국민이 놀라고 기뻐하면서 축하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곧이어 러시아의 톨스토이 문학상 해외문학상도 한국계 미국인 작가 김주혜가 받게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발표 후 며칠이 지나도록 흥분과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수상자인 한강과 김주혜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의 저력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가을날 저녁 전해진 희소식에 사람들은 가뭄에 단비를 맞이한 듯 자기 일처럼 흥분하며 설레는 마음을 주고받는다.

가야산 산골 깊숙이 자리 잡은 해인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인사승가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는 학인 스님들에게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필자는 현재 승가대학에서 학인 스님들의 설법 수업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학인 스님들이 대중 앞에서 설법을 할 때 필요한 역량을 기르는 수업이다. 그 설법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설법안을 작성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일종의 글쓰기 수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침 수업시간, 출석을 다 부르자마자 진도를 나가기도 전에 학인 스님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한강의 소설을 읽어본 적 있는지부터 노벨 문학상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 쉬어갈 틈이 없다. 평소 같으면 질문하라고 해도 시큰둥하던 스님들이 갑자기 활기를 되찾고 마치 아이들처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학인 스님들이 이렇게 문학에 관심이 많았었나 하고 새삼 놀라면서 그런 반응이 내심 반갑고 덩달아 설렜다. 다들 소설가나 철학자가 된 것처럼 글을 쓴다는 것,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지, 세상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안아야 할 것인지 등등 저마다의 생각과 주장을 하면서 수업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학인 스님들과 질문을 주고받다 보니 지난밤에 원고를 쓰면서 쌓였던 피로가 사라지고, 어느새 기운을 받은 듯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강의실을 나서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무엇이 이 산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에게까지 이런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것일까. 대다수 사람들이 같이 공감하고 공명하는 힘, 그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노벨상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뿌듯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문학의 힘이자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아마도 특히 우리 스님들에게는 그 이야기의 힘을 믿는 가풍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로 가득 찬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며 체화된 상상력일 것이다. <팔만대장경>이야말로 이야기의 보고이자 그 존재 자체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국적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않는 문학의 힘이다. 전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이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면서 <팔만대장경>을 대대로 전승하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노벨 문학상은 많이 늦게 도착한 편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해놓은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 속에는 <화엄경>의 선재동자 이야기를 비롯한 <법구경>의 비유 등 친숙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서사와 비유들은 단순히 교리 전달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서로 공명하고 유대하면서 고통을 이겨내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처럼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팔만대장경>도 만들어지고 노벨 문학상도 생겨난 것이다.

오늘 오후에는 깊어가는 가을 단풍 속에서, 노벨상 전체를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팔만대장경>이라는 이야기 보물 창고인 장경판전 주변을 거닐어볼 생각이다. 그곳에서 과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현재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며, 미래 세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상념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경향신문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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