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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카페 2030] 쓰지 않던 근육, 손글씨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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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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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빼곡한 광화문 교보문고. 그 한편의 전시 공간에서 차분한 글씨 여럿이 눈에 들어왔다. ‘제10회 교보 손글씨 대회’ 수상작. 입상한 초등학생, 성인, 외국인 손글씨 저마다 개성도 개성이었지만, 모두 하나같이 정성이 느껴졌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 손에 이끌려 손글씨 대회에 나갔다. 주어진 문장을 한글 정자체(正字體)로 옮겨 적어야 했다. ‘글짓기도 아니고 똑같은 글을 베껴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갸우뚱한 기억이 있다. 손글씨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손글씨의 공간은 점점 줄었다. 요즘 지하철에서 학생들이 태블릿, 스마트펜으로 문제 푸는 모습을 보면 필기는 필기인데 예전 같은 느낌은 아니다. 대학 강의실에도 손글씨 자리는 거의 없다. 스마트폰으로 녹음하고, 앱으로 활자로 전환하면 챗GPT가 일목요연하게 정리까지 해주는 과정에 손글씨가 비집고 들 틈은 없다.

날마다 글자를 접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지만, 손글씨 기억은 요원하다. 지금 이 글도 노트북의 몫이다. 수습기자 시절에는 의무적으로 하루 기사 2건을 필사한 적이 있다. 길거리 벤치에서, 택시 안에서 휘날려 썼던 글씨는 초등학생 시절보다 형편없어졌다. 좋은 글씨체를 위해서는 필압(筆壓)이 중요하다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마트폰, 노트북에 절여져 손글씨 근육과 기억이 퇴화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퇴화가 당연할 수 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어린 세대에겐 손글씨는 생소한 게 당연하다. 지난 7일 교총이 발표한 초중고 교원 5848명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94.3%는 ‘디지털 기기 보급으로 손글씨가 줄어 학생들의 필체 가독성이 나빠졌다’고 응답했다.

손글씨는 이대로 사라질까 싶지만, 반전도 있다. 스웨덴은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에 대처하기 위해 학교에서 종이책, 손글씨 같은 전통 방식의 교육 시간 비율을 다시 늘리고 있다.

경북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창용쌤 글씨 교실’도 비슷하다. 이 선생님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분필로 쓴 칠판 판서에 집중한다. 아이들은 수업용 태블릿이 있지만, 칠판만 보면 1990년대 모습이다. 판서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이 선생님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육도 바뀌어야 한다”면서도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 현란한 효과보다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판서의 힘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창의성과 사고력은 패드(태블릿) 터치할 때 키워지는 게 아니고 때묻은 책을 손으로 넘길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힘도 길러진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손글씨에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사람이 늘고 있어 반갑다. 올해 10회 교보 손글씨 대회 예선에는 4만4993명이 참여했다. 전년보다 3만254명이나 늘었다. 대회 응모 조건은 ‘감명 깊게 읽은 책 속 문장을 골라 50자 이상 손글씨로 작성’이다. 내년 대회 참가를 목표로, 앞으로 매주 한 번씩 퇴화한 손글씨 근육을 다시 키워볼 계획이다.

[이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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