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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금)

[단독] 판사 엑소더스… 올해만 94명 나갔다, 10년새 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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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법관 연말 100명 넘을 수도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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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 A씨는 지난 2월 퇴직했다. 23년간 근무한 법원을 떠난 이유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A씨는 “20년 넘게 판사를 해도 빚 얻어서 집 한 채 겨우 살까 말까 하는 수준이다. 아예 집이 없는 경우도 많다”며 “한창 자녀들 교육비가 필요한 상황에 보수가 나은 변호사 개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같은 시기 퇴직한 지방의 한 고등법원 판사도 “법원에 더 남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불경기를 판사만 피해 가란 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딸 대학 등록금에 연로하신 부모님 부양비에 마이너스 생활을 끝내려면 법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판사들이 법원을 떠나고 있다. 연말까지 퇴직 판사가 100명을 넘길 가능성도 있다. 최근 10년 사이 최대치다. 특히 법원의 ‘허리’라고 불리는 15년 차 이상 중견 법관의 퇴직이 두드러진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작년 12월 취임 후 법관 증원과 인력 확충을 강조하며 관련 정책을 쏟아냈지만 아직까지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선일보

그래픽=박상훈


24일 국민의힘 송석준 의원이 대법원 법원행정처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 전국 법원에서 퇴직한 판사는 94명이다. 2021년 91명에서 2022년 88명, 2023년 80명으로 줄다가 올해 급격히 늘었다.

특히 지방법원 부장판사와 고등법원 판사 등 경력 15년을 넘긴 중견 법관들의 이탈이 부쩍 늘었다. 2019년에는 지방법원 부장판사·고등법원 판사 33명이 퇴직했는데, 올해는 9월까지 72명이 법원을 떠났다. 6년 사이 중견 법관 퇴직자가 2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전체 퇴직 법관의 76.5%다. 중견 법관은 실무에 가장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는 법원의 핵심 인력인데, 이들이 법원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판사들이 법원을 떠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먼저, 변호사 생활과 비교할 때 처우 및 보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중견 법관들은 로스쿨 도입 전 사법고시 출신이 대부분이다. 동년배 변호사들이 대형 로펌에서 버는 수입과 판사 월급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차이가 크다고 한다. 서울고법 판사 출신 변호사는 “부장판사 이상 출신으로, 로펌에 가면 판사 월급의 최소 3~4배는 될 것”이라며 “대형 사건 참여나 직접 수임한 사건 수당 등을 보태면 판사 몇 년 치 연봉을 몇 달 안에 벌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방 순환 근무로 인한 부담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판사는 일정 근무 기간을 채우면 지방→수도권→서울 등으로 근무지를 옮겨 다녀야 한다. 연차가 찰수록 판사들이 지방 근무 등으로 가족과 떠나 지내야 하는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현직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기본적으로 모든 판사에겐 ‘언젠가 지방을 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다”며 “특히 서울에서 자리 잡은 판사가 지방 발령을 받으면 차라리 사표를 내고 정착을 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실제 서울중앙지법 퇴직자 수는 2020년 6명, 2021년 8명, 2022년 11명, 2023년 15명, 올해(9월까지) 18명으로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서울고법도 2020년부터 작년까지는 퇴직자 13~14명 수준을 유지하다가 올해 18명으로 증가했다.

전관(前官)예우를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변호사 업계 분위기도 퇴직을 앞당기는 이유 중 하나다. 국내 변호사 수는 2014년 1만8708명에서 올해 10월 3만5983명으로 10년 사이 2배가량으로 늘었다. 실무에 능통한 중견 변호사들도 이미 시장에선 포화 상태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법원을 나가 경험을 쌓으려는 판사가 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직 서울고법 판사는 “과거보다 전관의 힘이 약해져 솔직히 개업해도 예전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왔다”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나와야 나이 들어 밥이라도 먹고 살겠다 싶어 결심한 것”이라고 했다.

판사들은 “변호사뿐 아니라 다른 진로의 선택지가 많아진 것도 퇴직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최근 학계나 다른 공직(公職)으로 직업을 아예 바꾸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5년 법관 생활을 뒤로하고, 서울의 한 로스쿨 교수로 이직했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평생 법조계에서 일해야 한다는 과거 인식과 달리 역량을 개발하거나 관심 분야를 연구하고 싶어 하는 젊은 판사가 많아졌다”며 “법조계 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게 젊은 판사들의 특징”이라고 했다.

이런 법관 이탈 가속화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중견 법관 퇴직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풍부한 재판 경험을 갖춘 중견 법관이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처우나 근무 환경·인사 제도 등을 개선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박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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