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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차 좀 빼주세요” 전화하니 박찬숙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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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아파트 주차 차단기는 없는 편이 더 낫다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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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이걸 어쩌지.” 거대한 9인승 하얀색 승합차가 차 뒤를 가로막고 있는 걸 보니 난감해진다. 새벽 5시 40분. 아무리 바로 인근에 있는 수영장이라지만 지금 출발하지 못하면 6시 강습 시작에 못 맞춘다. 온 힘을 다해 차 꽁무니를 힘껏 밀어본다. “끄으으응” 소리만 나고 꿈쩍도 안 한다. “헐, 사이드 브레이크도 걸어 놓은 거야!”

2년 전, 30년이 넘은 이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달랑 두 사람 단출한 가족이지만 온갖 전자기기로 그득한 집을 견디지 못한 두꺼비집이 몇 번이나 내려가 촛불을 켜기도 하고, 베란다 문을 열어놓으면 창문 앞으로 고개를 기우뚱 숙인 고목과 동거하는 온갖 벌레가 집으로 기어 들어와 소스라치기 다반사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성가신 일은 주차였다.

우리 아파트에는 지하 주차장도, 주차 차단기도 없다. 정문과 후문에는 차단기 대신 늠름한 궁서체로 아파트 이름이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덩그러니 서 있는 게 전부다. 그래도 주차 문제로 큰 소리 한번 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파트 마당 주차선을 두고 아름다운 격자무늬를 이루는 이중 주차 대열 뒤에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작동되고 있어서다. 오후 두세 시가 되어야 장을 보기 위해 시동을 거는 2층 할머니 차는 이중 주차로 막아도 되는 주차선 가장 안쪽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고, 늦게 퇴근해서 새벽에 출근하는 10층 아저씨의 검은색 차는 늘 이중 주차 자리다. 아침이면 제일 먼저 사라지니 다른 차를 가로막는 일은 없지만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중립에 맞춰 놓는 걸 잊지 않는다. 급한 사람은 밀고 나가시라. 그런데 이 차주,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 두다니, 룰을 넘으셨네.

사람이며 차며 마음껏 드나드는 아파트 마당은 동네 사람들이 지하철역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커다란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 밑 벤치는 동네 노인들의 사랑방이다. 더군다나 아파트 마당 한편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4면짜리 테니스장마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사실 이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하리라 마음먹은 데는 이 테니스장도 한몫했다. 탕, 탕 경쾌하게 튀어 오르는 테니스공 소리를 들으니 창고에 넣어둔 라켓이 생각났다. 그런데 교습 문의를 하니 “1년치 수강생이 밀려 있어요”라며 단박에 전화를 끊어버린다. 치솟는 땅값을 감당 못해서인지 과거에는 대단지 아파트 마당마다 하나씩 있던 테니스장이 사라져서 희귀해진 요즘, 테니스장 라이트는 꺼질 새가 없다. 인기 있는 등산 코스도 아파트 뒷마당에서 이어지니 주말이면 등산객 차들도 슬그머니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니 낮이고 밤이고 주차가 쉬울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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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파트에 설치된 주차 차단기 /인터넷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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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0년을 나이 먹은 아파트에 갑자기 주차 차단기를 설치한단다. 카톡으로 투표 안내 문자가 울린다. ‘주차 차단기 설치 시 장단점 비교’라는 안내문이 먼저 뜨는데, 장점으로는 ‘불법 주차 환경 개선 및 테니스장 차량에 대한 주차 비용 부과’가 1순위이고, 단점으로는 ‘7000만원 상당의 차단기 설치 비용 및 유지·보수 비용 발생’이 예상된다고. 우리 아파트 10년 근무 경력의 베테랑 경비 아저씨에게 슬쩍 분위기를 물어보니 그동안 몇 번이나 차단기 설치로 투표했는데, 번번이 통과가 안 됐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파트만큼이나 나이가 들어버린 노년층 세대주들이 주차로 전혀 불편함을 느낄 새가 없으니 그 큰 돈을 뭐 하러 들이겠냐고 하신다. 경비 아저씨는 아마 이번에도 통과가 쉽지 않을 거라며 자신 있게 예측하신다. 과연 그럴까.

차단기가 없어 좋은 점이 더 많은데, 알고들 있을까. 친구들과 어깨동무하며 아파트 마당을 등하교 지름길로 삼는 귀여운 초등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좋고, 무더운 여름날 고목이 드리우는 그늘 밑에 나란히 맨발을 꺼내놓고 앉은 할머니들의 두런거림도 나는 좋더라. 높이 쌓아 올린 성벽에 둘러싸인 요새 같은 아파트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칠 일도, 타인의 삶을 알 필요도 없어진다. 이제 삶의 편리함이란 고립의 자유와 같은 말이 되었다. 아파트 사잇길마저 막아 놓고 뾰족한 철창으로 굳게 닫아놓은 대문에 붙인 표지판의 글씨가 어찌나 쌀쌀맞던지. ‘입주자 외 절대 출입금지, 다른 길로 돌아가세요.’

조바심에 몇 번 더 차를 밀어보다가 유리창 뒤로 보이는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침 일찍 죄송하지만 차 좀 빼주셔야겠어요.” “아이고, 죄송해요. 금방 내려갈게요.” 잠시 서성이고 있자니 범상치 않은 큰 키의 여성이 성큼성큼 다가와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늘 새벽 운동 가느라 여기에 세워두는데 오늘은 제가 늦었네요. 금방 뺄게요.”

아니, 왕년의 농구 스타 박찬숙! 며칠 후 아파트 앞 사거리마다 펄럭이는 현수막에 유독 눈길이 간다. ‘박찬숙 감독, 서대문구 여자 농구단 첫 우승!’ 이웃사촌의 우승 소식에 기분이 다 좋다. 오늘 밤도 늦은 퇴근길에 주차 자리 찾느라 뱅글뱅글 돌 생각에 귀찮기도 하고, 차단기 설치 투표 결과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한데, 사람이 엉켜 산다는 게 뭐 그런 것 아니겠나. 비켜주고, 양보하고, 내어주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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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숙 서대문구 여자농구단 초대 감독은 “오랜만에 코트에 돌아와 설렌다”며 “간절하지만 뛸 곳이 없는 선수들을 선발해 화려한 공격 농구를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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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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