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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일)

이러다 다음 전쟁터는 한반도가 된다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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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대통령궁이 수도 키예프 인근에 화염이 일어나는 모습을 공개했다. <시엔엔>(CNN)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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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 논설위원



지난 며칠간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란 심란한 뉴스를 지켜보며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동안 한반도를 둘러싸고 적잖은 ‘위기설'이 나돌았지만, 이번만큼 진짜 전쟁이 터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숨이라도 돌릴 겸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지난 8월 초 펴낸 정책 구상집(‘보수정치가 이시바 시게루―나의 정책, 나의 천명’)을 꺼내 읽다, 그가 강연 때마다 청중들에게 소개한다고 강조한 ‘쇼와 16년(1941) 여름의 패전’ 책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이 책은 80여년 전 일본이 저질렀던 뼈아픈 ‘판단 미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미-일 개전을 앞둔 1940년 9월 일본 정부는 “국가총력전의 방책을 연구해 국책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총력전연구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모인 이들은 육해군과 내무성·대장성·상공성 등 정부 부처, 일본제철·일본유선·도메이통신(현 교도통신의 전신) 등 주요 국책 기업에서 활약하던 30대 초중반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개전을 코앞에 둔 1941년 7월부터 전쟁 모의시험(시뮬레이션)을 진행해 “초반엔 일본이 우위를 점하겠지만, 서서히 미국의 산업생산력 등이 발휘되고 소련도 참전해 3~4년 뒤엔 패배할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결론이 나왔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피해야 했다. 그러자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자네들 얘기도 알겠네만, 일-러 전쟁 때도 그랬듯이 전쟁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네.” 결국 12월8일 진주만 공습이 이뤄졌고, 젊은 엘리트들의 예측대로 3년8개월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일본은 ‘개전’하기 전부터 ‘패전’한 셈이었다.



국가정보원의 지난 18일 발표 이후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사실로 확인되며, 정부 안팎에서 험한 말들이 오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4일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검토해나갈 수 있다”고 했고, 신원식 국가안보실장과 여당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인 한기호 의원은 “우크라와 협조해 북괴군 부대를 폭격”하고 이 자료를 “심리전에 써먹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문자 대화까지 나눴다. 혈맹 관계를 회복한 북-러 동맹을 상대로 당장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윤 정부가 추진해온 한·미·일 3각 협력 강화 노선 전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 정부 요직에 들어앉은 이들이 유능했다면, 북·중·러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정책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일이 쏟아내는 현란한 찬사에 취한 윤 정부는 폭주할 뿐이었다. 상대의 과도한 칭찬엔 늘 ‘이렇게 해도 괜찮겠어? 결국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하는 거야'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려대로 윤 정부 출범 불과 2년 반 만에 남북 관계는 파탄났고, 북-러 동맹이 복원되면서 30여년간 공들여온 북방 외교는 물거품으로 변했다. 조태열 외교장관이 24일 중국에 “북핵 문제와 불법적인 러-북 협력에 적극 대응해주기를 기대”한다고 했지만, 우린 맘대로 하면서 저들이 우리 뜻대로 움직일 거라 기대해선 안 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23일 한국의 살상무기 지원과 관련해 “가혹하게 대처할 것”이라면서도 “러·한은 훌륭한 교류와 상호 이해와 협력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4~25일 지난 6월 서명한 ‘북-러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 4조(상호 원조)를 언급하며 어떻게 할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헌장 51조가 허용하는 ‘집단적 자위권’에 따라 우크라이나가 지난 8월 점령한 러시아 영토인 쿠르스크주를 탈환하는 데 북한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런 변명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곤란하겠지만, 러시아가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80여년 전 도조 같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모험주의는 곤란하다. 상대가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조처’를 생각하면서 치밀한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러시아가 겪는 고통은 일시적·국면적·전술적이지만, 우린 북한이라는 증폭 장치를 통해 영구적·전면적·전략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북-러의 군사협력 정도에 따라 미국이 제공해온 ‘확장억지’(핵우산)가 벗겨질 수도 있다. 폴란드와 발트3국엔 북한이 없다. 이대로 가면, 다음 전쟁터는 틀림없이 한반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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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5일 카잔 엑스포 국제전시센터에서 열린 2024년 브릭스 정상회의 기간 중 밀로라드 도디크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과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볼시예카바니/타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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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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