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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월)

이미 예견됐던 ‘채식주의자’ 폐기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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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대표작 ‘채식주의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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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 오픈데스크팀장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인 2022년 8월30일 ‘2022 개정 교육과정’의 첫 시안이 공개됐다. 초·중·고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을 정한 가이드라인인 교육과정 개발을 위해 교육부는 처음으로 국민참여소통채널을 열어 의견을 수렴했고 같은 해 9월19일 첫 시안에 대한 ‘국민 주요 의견’을 공개한 바 있다.



당시 교육부 출입 기자였던 나는 보도자료 말미에 정리된 이른바 ‘주요 의견’을 읽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사회적 소수자 예시에서 성소수자를 삭제해달라”, “인권 관련 지도 시 동성애, 성전환, 낙태 등 사례가 포함되지 않도록 조처해달라” 같은 주장이 정부 공식 보도자료에 실린 것이다.



브리핑에서 ‘혐오에 기반한 주장을 보도자료에 가감 없이 쓰는 것이 적절하냐’고 따져 묻자 교육부 관계자는 “교육부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성소수자, 성적 지향과 관련된 문제는 첨예한 (다른) 생각이 있기 때문에 서로 상충된 부분을 연구진이 검토해달라는 취지”라고 답했다. 해당 주장들이 ‘주요하다’고 판단한 근거나,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해 말 확정·고시된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성소수자, 성평등, 재생산권, 섹슈얼리티 등의 표현이 빠진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엔 인권이사회가 “국제 인권규범에 명시된 교육권과 건강권을 위반한 것으로 보인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해 정부는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 폐기 논란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2년 전 일이 떠올랐다. 경기도교육청은 지난해 ‘청소년 유해도서를 분리·제거해달라’는 내용의 보수 성향 학부모 단체 민원을 접수하고 이들의 주장이 담긴 언론 기사 링크를 첨부한 공문을 각 교육지원청에 두차례 보내놓고도 노벨상 수상 이후 논란이 커지자 “도서의 폐기 등은 각 학교가 운영위원회를 열어 자율적으로 판단했다”고 해명에 나섰다. ‘국민 주요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혐오 발언을 유통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2년 전 교육부의 행태와 너무나 닮아 있다.



공문 이후 경기도 초·중·고교에서 폐기된 도서는 2517권, 열람이 제한된 도서는 3340권에 이른다. ‘채식주의자’는 한 고등학교에서 2권이 폐기됐고, 중학교 두곳에선 열람이 제한됐다.



언론 기사 링크는 ‘참고용’일 뿐이었다는 교육청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이가 얼마나 될까. 현장 교사들은 분노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경기지부는 지난 11일 성명에서 “기준도 논리도 없는 보수 학부모 단체 민원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멈추라”며 “경기도교육청의 무분별한 검열은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경기도만의 일도 아니다. 전교조가 6월24일부터 7월15일까지 전국의 학교도서관 담당자 141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2명 가운데 1명(48.2%)이 성평등·성교육 도서 ‘구입 방해’ 압력이나 지시를 직접 받거나 목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폐기 또는 열람 제한’ 압력이나 지시를 직접 받거나 목격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도 53.2%에 달했다.



특히 압력을 가한 주체(복수응답)로 학부모·시민 단체(51.1%)만큼 교육청(50%)이 꼽혔다. 교사들이 “일부 단체의 요구에 교육청이 제대로 된 심의 과정도 없이 압박을 주는 공문을 지속적으로 보낸 것은 명백한 검열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동성애 혐오 주장을 펼치고 성평등 교육에 반대해온 전국학부모단체연합이라는 곳에서 이제는 ‘채식주의자’의 전국 초·중·고교 도서관 비치를 반대하고 나섰다고 한다. 이들의 표적이 ‘채식주의자’만이 아니라는 점을 다들 눈치챘을 것 같다. ‘현대판 분서갱유’(전교조)라는 말까지 나오는 가운데, 이번에는 나의 불길한 예감이 틀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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