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헤리티지 여행⑦
미다스왕릉옆 고르디온 박물관에 있는 수호신(스핑크스, 유니콘) 금속조각 예술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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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산 만한 봉분 속 가운데에 있는 시신 안치실은 나무로 되어있고, 이 왕릉 어디에도 금(金) 한 톨 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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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온박물관에 있는 미다스왕릉 목조 시신 안치도 미니어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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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문화관광부에 따르면, 고르디온은 인류가 무려 4500년 동안 거주한 정착지이다.
고르디우스와 미다스 부자(父子) 왕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넘치는 고르디온에 다양한 문명의 흔적이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중요한 무역로를 따라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인근 강에서 과학적 수로로 물길을 터 농경, 공방 등을 하기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히타이트 제국이 쇠락하기 시작하던 기원전 12세기 무렵 발흥해 기원전 9~6세기 고르디우스-미다스 왕 재위 때와 그 직후에 전성기를 맞는다.
고르디온의 위치. 앙카라 근교에 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이후 일부 세력은 퀴타이야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했다. 앙카라 동쪽 초룸은 히타이트의 수도(하투샤)가 있던 곳이다. 이스탄불과 지중해,에게해,흑해 해안지역을 제외한 튀르키예 모든 지역이 아나톨리아로 통칭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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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르디우스는 백성들에게 ‘이 광야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 같은 존재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나라 다운 틀을 갖추지 못한 채, 수백년을 이어가던 프리기아 사람들은 2900년전 고르디우스가 자신들 앞에 마차를 타고 나타나자 “당신이군요. 왕이 오신다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당신을 우리의 왕으로 모십니다”라고 추대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마차는 제우스 신전에 복잡한 매듭에 묶여 헌정되었지만, 영토확장 야심가 알렉산드로스가 이 매듭을 풀지 않고 칼로 잘라버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지어진 성채와 통치자의 무덤은 프리지아 엘리트층의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
미다스왕릉은 하나의 산이다.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왕릉으로 기록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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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만 남은 도성은 기원전 10~9세기에 지어졌다. 얕은 안뜰과 현관 앞에 깊은 홀이 있는 제1영역은 진흙벽돌과 목재로 지어진 생활공간으로 추정되고, 약간 높은 위치의 제2영역에는 화려한 무늬의 조약돌 모자이크 작품이 있는 석조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기원전 740년의 기둥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사람 이름과 프리기아의 어머니 여신인 키벨레(Cybele)의 이름이 적혀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미 프리기아인들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잠정결론을 내렸다.
프리기아 어머니 여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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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전 초기 프리기아 도성내에는 곡물을 빻는 공방, 벌집모양의 대형 오븐을 갖춘 주방, 양모 가공 섬유 공방 등 300명의 기능자들이 일하는 다세대 테라스 공간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 테라스 공간 내에선 사자의 몸과 사람의 머리를 가진 동물 문양이 새겨진 말 앞가리개 조각도 발견되었다. 이집트의 호루스상(스핑크스)을 연상게 하는 이 문양 속에는 날개달린 여신 위에 태양기호도 그려져 있었다. 고도의 예술, 종교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안채와 뒷편 공방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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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기아는 문화,경제에서는 강했지만, 도성의 군사시설은 다소 약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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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시설은 풍화에 약한 진흙벽돌로 높이 12m 가량 쌓은 단(段) 위에 4층 규모의 막사 단지가 있었는데, 기원전 540년 경 페르시아의 포위공격으로 파괴된다.
페르시아군은 이곳을 공격하기 위해 경사로까지 쌓는 치밀함(아직 유구가 남아있음)을 보인데 비해, 프리기아의 방어력은 다소 허술했던 것 아닌가 하는 추론도 나온다.
고르디온에는 100개 이상의 고분이 그리 멀지 않은 간격으로 산재해 있었다. 가장 큰 고분 미다스왕릉은 2700년 동안 침식되었어도 2024년 현재 높이가 53m에 달한다. 공식명식은 MM(미다스 마운드)이다.
미다스 왕릉(일부 학자는 고르디우스의 것이다 또는 선대왕과 후대왕 부자(父子)의 합장능이다는 주장도 펴고 있음)은 국내성에 있는 광개토왕릉을 연상케할 정도로 하나의 작은 동산 같은 모습이다. 이 고분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
미다스왕릉 지하통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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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남침용 땅굴 닮은 긴 터널복도를 지나는 것은 이집트 룩소르 ‘왕가의 계곡’ 고분 지하통로를 닮았다.
시신안치 설치물은 좀 특이하다. 앙카라의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서 히타이트 시대와 프리기아 시대 모두 왕과 귀족이 석관 위에 봉분을 씌우는 고구려-백제와 비슷한 형태가 많았음을 목도했는데, 미다스 왕릉 내부의 방은 목조로 되어있다. 커다란 통나무들을 네모로 쌓고 씨줄과 날줄로 엮어 민가의 2~3층짜리 목조건물을 보는 듯 하다.
미다스왕릉앞 고르디온 박물관에는 철기 시대 전기의 수공예 도자기, 프리기아 시대 전기의 철제 도구, 수입된 고대 도자기 등 유물이 연대기 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내가 만약~ 미다스 임금님과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튀르키예 한국어 문화해설사 Aybala Göksu씨가 고르디온 유적 앞에서 상념에 잠긴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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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기아의 전성기를 이끈 미다스는 국제 갈등을 외교로 풀려는 시도도 했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아시리아 영역의 위성왕국 개척에도 관심을 가졌고, 그리스 도시국가 ‘키메’의 공주와 결혼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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