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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국가의 성공과 실패 원인을 정치·경제 제도의 관점에서 분석한 미국 시가코대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와 MIT의 다론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교수가 공동 수상했다. 이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바람직한 제도를 기반으로 이뤄낸 대표적인 성공 사례”라고 평가했다. 매우 성공적인 수출주도 경제발전에 이어 민주화라는 포용적 제도까지 성취하며 지속가능한 번영의 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역할과 기능은 지식 생산, 산업화 기반 제공, 맨해튼·아폴로 프로젝트 같은 범국가적 목표 달성, 그리고 기후변화와 난치병 같은 인류 공동의 문제해결까지 매우 다양하다. 한국은 이 중에서 특히 과학기술 창달을 통한 경제발전 기여를 국가발전 핵심전략으로 채택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에 이를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62년부터 1992년까지 총 6차에 걸쳐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사회구조도 복잡해진 1993년 이후에는 경제사회발전계획으로 명칭이 변경됐지만 기술혁신을 통한 산업경쟁력 강화라는 전략의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 R&D(연구개발) 투자는 국가경제발전계획과 긴밀히 연동돼 이뤄졌다.
국가 경제발전계획과 연계된 관주도형 R&D 투자전략은 매우 독특한 결과를 낳았다. 잘 훈련된 인력과 요소기술을 국내 기업에 풍부하게 제공하며 주력산업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지속적으로 첨단산업 영역을 개척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런 한국 고유의 추격형 R&D 투자전략은 저개발국들의 가장 효율적인 국가발전 모델로도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반면 과학 저널인 ‘네이처’는 최근 기초과학의 연구 성과를 수치화해 발표하는 네이처 인덱스(nature index)에서 한국이 R&D 투자 대비 성과가 부족하다는 특집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권위가 있는 국제 학술지인 만큼 국내 언론에서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쓰는 기사들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R&D 전략의 특수성과 국가 발전과의 연계성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이 결여된 지극히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시선일 뿐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정부 R&D 예산은 약 30조 원에 이르지만 1964년에는 단돈 20억 원에 불과했다. 1990년대에는 1조 원, 2000년대 초반이 돼서야 간신히 5조 원에 도달했다. R&D 투자는 예산 투입 후 인프라 안정화, 문화와 인식의 변화, 인재 성장과 지식축적, 산업 생태계 변화 등과 함께 성과가 나온다. 따라서 투자 대비 효과를 논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투자 이력이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하는데, 현재의 투입량을 기준으로 ‘저성과’를 판단한 것은 명백한 오류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을 위한 응용⋅실용화 연구에 투자를 집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기초과학의 투자 비중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네이처의 평가 도구인 네이처 인덱스가 낮은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네이처 인덱스가 낮은 것은 팩트이지만 그렇다고 투자 대비 저성과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짧은 R&D 투자 역사와 응용기술 중심의 투자전략에도 불구하고 네이처 인덱스로 본 국가별 기초과학 순위에서도 세계 7위에 오르는 등 중국,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등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다소 오만하게도 느껴지는 일방적 저성과 딱지 붙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 놀라운 성장 속도와 비결을 다각도로 해부하고 집중 조명했어야 할 일이다.
한국의 과학기술자들과 정책입안자들 역시 이제 더 이상 과거의 R&D 전략으로는 글로벌 경쟁력과 지속가능한 번영을 담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R&D의 혁신은 매우 복잡한 고차원 방정식을 푸는 것과 같다. 기초연구를 강화해 네이처 인덱스를 높이고 노벨상도 수상해야 하지만, 전 세계적인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우리나라의 지속가능한 번영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가전략기술 확보에도 힘써야 한다. 또한 남북 대치, 에너지 위기, 기상이변, 고령화처럼 국가와 지구촌 전체의 평화와 복리 증진을 위해 마땅히 기여해야 할 임무들도 산적해 있다.
현재 대한민국 과학기술계는 과거의 성공을 뛰어 넘을 새로운 선도형 R&D 전략 수립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선배들의 국가발전전략과 노력이 실패했다면,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빈곤 국가로 남아 있었다면 R&D 혁신에 관한 논의는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한국 R&D가 실패했거나 저성과라서가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에 R&D 혁신을 논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글로벌 선도 국가의 품격에 걸맞은 새로운 R&D 전략의 수립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선배 정책입안자들의 노고와 과학기술인들의 헌신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자양분 삼아, 우리도 이 새로운 도전과 혁신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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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광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생체재료연구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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