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성 전 광주대 교수]
10월 문학제
지난 10월 5일 토요일 대구경북작가회의(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 주관으로 제12회 10월 문학제가 개최되었다. 10월 문학제는 1946년 대구에서 벌어졌던 10월 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올해 주제는 "10월의 심장으로 걸어가다"였다. 한편 금년에는 문학제와 함께 대구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일대의 답사도 진행되었다. 이 두 곳은 민간인을 국가가 학살한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10월 문학제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해주었다. 나는 민교협 회원 자격으로 문학제와 답사에 참가했다.
1946년 10월 항쟁의 역사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인들은 해방 이전에 일제의 쌀 공출제로 큰 고통을 겪었다. 이 때문에 1945년 9월 17일 들어온 미군정은 공출제를 자유수급제로 변경하여 한국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했다. 한국인들은 해방과 공출제 폐지로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쌀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므로 자유수급제 하에서 오히려 쌀 가격은 급등했다.
이에 미군정은 쌀 1가마니의 최고가격이 39원을 넘지 못하게 하는 등 가격안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암시장이 형성되고 매점매석이 성행하면서 쌀 가격은 더욱 올랐다. 결국 미군정은 그 다음 해인 1946년에 자유수급제를 포기하고 배급제로 전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여전히 쌀이 부족한 상태여서 배급은 충분하게 이뤄질 수 없었고 경찰들이 일제 강점기 방식 그대로 농민들의 쌀을 강탈하다시피 함에 따라 대중들의 분노가 치솟았다. 이에 1946년 7월부터 대구, 부산 등을 중심으로 '쌀 획득 투쟁'이 발생했다. 일종의 빈민 항쟁이었는데 심지어는 어린이도 참여할 정도였다.
1946년 10월에 벌어진 10월 항쟁은 추수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추수기는 햅쌀이 나오는 시기이므로 대중은 쌀 가격의 안정을 기대했다. 그러나 쌀 가격은 떨어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대중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중은 쌀 가격 상승에 상응하는 임금인상을 요구했고, 철도, 우편, 전매 부문에서 총파업을 벌였다. 그런데 이에 경찰이 강력 진압에 나서면서 노동자들이 사망했고 대구의전을 중심으로 시신탈취도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계엄령 선포 이후 다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불행한 결과가 벌어졌다(미국 기록보존서 자료에 의하면 24명 사망). 한편 대구에서 발생한 봉기는 경부선 철로를 따라 확산되었다. 영천에서는 강제로 쌀을 공출하는 군수를 습격하는 등 경북 전 지역으로 봉기는 확산되었다. 10월 항쟁 참여자에 대한 검거와 수감은 1949년까지 이어졌다(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확인).
대구 가창골 양민 학살 사건
답사팀은 가창골 양민학살 현장을 먼저 찾았다. 가창골은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재수감, 예비검속 등을 통해 10월 항쟁 참여자들이 학살당한 곳이다. 가창골 이외에 다른 골짜기에서도 소규모 학살이 경찰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1959년 가창댐이 준공되어 학살지가 상당 부분 수몰된 상태이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희생자 진상조사가 실시되었다. 국회에서 특위가 구성되었고 일부 양심적인 교도관들의 익명성 제보도 접수되었다. 유족들은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로 이 사업은 중단되었다. 유족회 탄압, 참여자 구속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국회 특위는 해산되었다. 이렇게 진상 규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2006년이 되어서야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고 2020년에 다시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여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과거 유족들이 탄압을 받은 탓인지 미신청자들이 상당수였다. 2023년 진상조사를 위한 예산이 배정되었지만 총 5억 원에 그치는 것이어서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올해는 학생들이 김천 소년형무소에서 끌려가 학살된 사례도 확인되었다. 9월까지 유해 발굴이 진행되었지만 예산이 없어서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경산 코발트 광산 양민 학살 사건
경산 코발트 광산은 1930년대 개발되었는데, 원래 이름은 '보국 코바르트'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 폐광되었다. 이 광산 지하갱도와 인근 대원골에서 1950년 7월 초에서 9월 초까지 10월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희생자는 경산, 청도, 영동지역 보도연맹원 1,200명과 대구 형무소 수감자 2,500명으로 추산된다. 학살 수행자는 군과 경찰이었다. 이들은 사람들을 4명씩 묶었고 그중 1명에게 총격을 가해 100m 지하 갱도로 모두 떨어뜨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대구 형무소에서 이곳으로 끌려 나와 학살당한 대부분의 기결수는 국가보안법이나 포고령 위반 등의 혐의로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결수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을 교육 명분으로 경찰서, 학교 등지에 소집했고 예비검속 상태에서 코발트 광산으로 끌어내 학살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관련 자료들은 이승만 치하에서 소멸되어 현재는 정확한 상황을 알기 어렵다. 4.19 혁명 이후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 전까지 유족들과 언론에 의해 그 참상이 일부 밝혀지기도 했다.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부가 들어서면서 이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다행히 2000년 초 유족회가 재건되어 진상규명 요구가 재개되었다. 2000년부터 5년간 유족과 지역 언론, NGO활동가들의 노력으로 폐광산 수직굴 1곳, 수평굴 2곳, 인근 대원골 골짜기에서 80여 구가 넘는 유해가 확인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3차례 국가기관의 발굴을 통해 500여 구의 유해가 수습된 상태이다. 현재는 예산이 없어 발굴 작업이 중단된 상태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민간 차원에서 유족들이 진상 규명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추모행사는 대구에서 유족들과 시민들의 참여로 진행되고 있다.
양만 학살 사건도 우리가 남겨야 할 역사
두 학살 사건이 벌어지던 시기에 그와 유사한 국가폭력이 전국에 걸쳐 발생했다. 광주의 경우에는 1950년 7월 2일부터 22일 사이에 광주교도소 수감자를 포함해 약 1,500명이 광주 망월동 용호부락 인근 등 5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당시 계엄 치하에서 헌병들이 사람들을 총으로 쐈고 그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태웠다. 향토사학자 박동기 등이 이 잔혹한 학살 사례들을 조사했고, 조금씩 그 전모가 밝혀지고 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국가폭력에 사과했고, 최소한 그 넋이라도 위로하고자 학살 현장 5곳에 위령비 건립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기록은 부실하다. 미국의 기밀 해제 문서를 통해 개략적인 학살자 수는 확인되었지만 그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승만 독재 치하에서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기록들이 소실된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 이 지역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에 관한 문헌들이 최근 다양하게 발표되고 있다. 정확한 학살자 수, 미국의 묵시적 혹은 명시적인 관여 여부, 그리고 야만적 국가폭력 주동자가 누구인지 등은 향후 밝혀내야 할 사안들이다. 누가 억울하게 희생을 당했는지, 누가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진정한 해결이 가능하다. 제12회 10월 문학제 자료집에는 정대호의 시 <경산 코발트 광산 유해를 보고>가 실려 있다. 이 시를 인용하면서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경산 코발트 광산 유해를 보고> - 정대호
글자로 쓰인 것들은 역사가 아니다. /힘센 사람들 눈치를 보며 /제가 쓴 글들로 하여 밥줄이나 잡으려는 /눈치 빠른 사람들이 서성거리며 지나간 자리, /여기까지 말해도 괜찮을까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적당히 손발 빠져나갈 자리를 찾아두고 /끄적거리며 지나간 자리, /바로, 책에서 읽은 역사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조국의 역사는 /여기 이렇게 남아있다. /수북이 광주리에 담아 놓은/ 뼈 조각 /이빨 몇 개 /총알과 탄피 /묶은 끈
어린아이의 갈비뼈 /건강한 청년의 누런 정강이뼈 /여자들의 엉치뼈 /위에서 아래로 총알이 지나간 두개골 /작은 두 개꼴, 큰 두개골 /황금 이빨, 백금 이빨, 삭은 이빨 /권총알 카빈총알 기관총알
차마, 글자가 두려워 기록하지 못한 /역사는 이렇게 남아있다 /1945년 9월 7일 /점령군이 포고령을 발표해도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제 말소리 당당하던 사람들이 총알 맞고 죽을 때에도 /멀리서, 듣고 구경하며 괴로워했던 얼굴들 /어, 어?, 어! /그들도 어느새 굴비처럼 엮어 여기 총알받이 되었다고 /여기 담겨있는 뼈들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라고
참고문헌
김상숙, <10월 항쟁 -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돌베개, 2016.
대구경북작가회의, <2024년 제12회 10월 문학제 - 10월의 심장으로 걸어가다>, 2024.10.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Ⅰ,Ⅱ,Ⅲ, 2010.
▲대구 10월 항쟁 당시 사진. 공출된 쌀을 지키고 있는 경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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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전 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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