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주기에 들렸던 술집의 사장님은 내가 오늘 첫 손님이라며 평소보다 핼러윈 때 더 장사가 안 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올해 2주기에도 찾아갔지만 가게가 사라지고 없었다. 참사의 상흔은 여전히 이태원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도 다행히 올해 이태원 핼러윈의 밤거리는 다소 붐볐다. 1주기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돌아왔다. 나는 참사를 애도하는 버스킹 공연과 행진에 참여했다. 북소리를 앞장세워 북적이는 거리 사이를 춤추며 나아갔다. 거리를 압도하는 타악기 소리에 행진대열도 관객도 신이 나 어깨를 들썩였다. 사람들 사이에 애도와 슬픔이 흥겨움과 공존했다. 참사가 일어난 골목을 지나치면서, 인파들 사이 어디선가 희생자들이 함께 춤추고 있는 것 같았다.
참사 이후 엄숙한 애도가 아닌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애도, 축제를 통한 애도를 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하고 들었다. 올해 2주기 핼러윈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상징들이 턱없이 부족한 지금의 이태원 거리에서, 핼러윈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은 계속 참사를 기억할 수 있을까? 2주기는 축제에 애도를 도입할 방법을 과제로 남겼다.
언론들은 1주기, 2주기 이태원 거리에서 어떤 ‘애도의 축제’가 있었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이태원 핼러윈 축제가 언제 시작됐는지 공식 기록이 없는 것처럼, 한밤중에 사람들로 다시 북적이게 된 거리 안으로 들어가 취재하는 언론은 많지 않았다. 이태원 핼러윈과 관련한 언론보도는 주로 몰도덕적인 군중들이 모여 유흥을 즐기느라 공중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낙인을 반복해왔다. 그 낙인과 마찬가지로, 참사 당일 군중의 문란함을 단속하고자 이태원에 배치된 138명의 경찰은 참사 발생을 조기에 인지하는 데 실패했고, 참사 이후 “놀다가 죽었다”는 말은 참사의 원인을 군중의 문란함 탓으로 돌렸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도 이태원 참사의 원인이다. 비록 참사 1주기에 ‘엄숙하고 조용한’ 태도를 취했지만, 2주기에 사람들이 돌아오자 언론들은 다시 이태원을 문란한 장소로 그리기 시작했다. 2주기 이태원 핼로윈에서의 애도의 행진을 언급한 조선일보는 북소리가 공공질서를 위협해 안전사고를 불러일으킬 뻔했던 것처럼 기록했다. “놀다가 죽었다”며 군중과 희생자에게 참사의 원인을 전가하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참사가 제기한 ‘안전’의 의미에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조선일보와 같이 질서를 문란케 하는 군중을 탓하며 공중도덕의 안전을 주장할수록 이태원 참사의 애도는 어려워진다. 폴리스라인이 수호하는 질서의 안전과 놀러 온 시민의 안전은 동의어가 아니다. 이태원 참사는 시민의 안전이 뒷전이 되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는 시민의 안전을 질서의 안전과 동일시하는 한국사회의 빈약한 상상력이다.
군중의 문란함을 탓하지 않고 시민의 안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직 생기지 않은 그 길을 만들어 가기 위해 ‘문란한’ 애도의 북소리는 계속되어야 한다. 낙인을 가하는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군중 속에서 ‘애도의 축제’를 이어갈 때, 군중의 눈높이에서 시민의 안전을 질문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문란함’에서 애도와 안전의 길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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