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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고현곤 칼럼] 윤석열 정부의 세 가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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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고현곤 편집인


보수의 진정한 가치는 배려와 포용, 책임과 헌신, 그리고 겸손과 절제다. 박근혜 정부의 급작스러운 퇴장으로 보수의 가치가 무너졌다. 윤석열 정부가 되살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건 아닌데’라는 걱정이 생기더니 언제부턴가 ‘생각보다 너무 못한다’는 탄식이 들렸다. 요새 모임에 가면 “뭐가 더 나올까. 설마 정권이 어떻게 되진 않겠지?”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보수는 탄핵 트라우마가 있다.



국정 철학 빈곤으로 독단·즉흥 운영

집권 내내 김 여사 리스크, 인사 잡음

진짜 보수는 실망 넘어 모욕감 느껴

윤핵관·원로마저 떠나고 고립 위기

2022년 7월, 취임 초인데도 지지율이 3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윤 대통령은 “대선 때도 지지율은 유념치 않았다.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천만의 말씀이다. 지지율은 민심의 바로미터다. 민심을 우습게 여기는 듯한 태도가 2년여 만에 지지율 19%(한국갤럽 1일)로 이어졌다. 윤 대통령 대선 득표율이 48.6%다. 절반 이상 지지를 철회한 셈이다.

‘윤핵관’이 많이 떠났다. 원로도 침묵한다. 한 인사는 “얘기해 봐야 대통령이 귀담아들을 것도 아니고, 망신만 당한다”고 말했다. 담을 쌓은 것이다. 증오보다 무관심이 더 무서운 법이다. 공무원은 대통령실 파견을 꺼린다. 경제부처 모 과장은 “용산에 갔다가 이 정부 라인으로 분류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중앙부처 공무원은 자존감이 강하다. 대통령 부부 인맥과 검찰 출신이 실세인 곳에서 들러리 서고 싶지 않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는 세 가지를 실패했다. 첫째, 국정 철학이 분명치 않았다. 국민은 윤 대통령을 잘 모르고 뽑았다. 문재인 정부의 위선에 질렸거나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싫어서 그를 택한 경우가 많았다. 평생 검사로 지낸 윤 대통령 자신도 충분한 준비가 없었던 듯하다. 검찰은 상명하복의 배타적 조직이다. 소통보다 지시에 익숙하다. 미래를 고민하는 직업이 아니다. 칼자루를 쥔 ‘갑’이다. 교도소 담 위에서 벌벌 떠는 사람 앞에 놓고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격노’가 유난히 많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검사 물이 덜 빠진 정치인이 대체로 위험한 이유다.

대통령의 메시지도 들쑥날쑥했다. 취임사는 자유와 공정·연대·박애를 강조했다. 프랑스혁명에도 나오는 좋은 말을 나열했지만, 지금 읽어 봐도 딱히 뭐를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공허한 느낌이 든다. 국정 혼선을 겪으며 메시지의 톤이 강해졌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는 “반국가 세력이 활개 치고 있다”고 극우 유튜버를 연상케 하는 표현을 썼다.

철학과 비전이 빈곤하니 국정이 독단, 즉흥으로 흘렀다. ‘굳이 왜 지금?’이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과정부터 석연치 않았다. 부산 엑스포 유치에 국운이 걸린 것처럼 매달린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느닷없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은 소모적인 역사 논쟁을 불렀다. 친기업을 표방하는 대통령이 주 52시간제 개편에 제동을 건 것도 의외다. 연구개발(R&D) 예산을 “나눠먹기”라며 대폭 삭감해 과학기술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의대 2000명 증원의 근거는 지금도 명확지 않다. 연금·교육·노동 3대 개혁은 뒷전으로 밀려 정권 초 골든타임을 놓쳤다.

둘째, 역대 대통령이 가족·측근을 단속하지 못해 오점을 남겼다. 하지만 김건희 여사처럼 대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구설수와 논란이 이어진 경우는 드물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권한을 준 사람은 대통령이다. 가족이나 측근은 1%의 권한도 나눠선 안 된다. 국민은 서슬 퍼런 군사정권 때도 그것만은 못 참았다. 대선 당시 김종인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장은 “대통령을 뽑는 거지, 대통령 부인을 뽑는 게 아니다”며 방어 논리를 폈다. 앞으로는 대통령을 뽑는 거지만, 주변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셋째, 인사가 만사라는데, 윤 대통령은 널리 인재를 구하지 않았다. 인연이 닿는 좁은 인력 풀을 고집했다. 김 여사가 아는 사람이 더해졌다. ‘작은 인연’에 의존해 사람을 허술하게 쓰니 탈이 났다. 수준 미달이 몰려들었다. 직언이 사라졌다. 일부는 완장 차고 설치고. 원래 변변치 않은 사람일수록 ‘높은 분’ 이름을 팔아 호가호위하는 법이다. 내각은 존재감이 없다. 장관은 대통령 눈치만 살핀다. 속칭 ‘도사’라는 해괴한 무속인에 이어 명태균은 또 뭔가. 공천 개입 진위를 떠나 대통령 부부가 그런 부류와 저급한 대화를 한 것 자체가 부끄럽다. 나라의 체통이 말이 아니다. 보수는 실망을 넘어 모욕감을 느낀다.

진짜 보수는 자신을 낮춘다. 스스로에 엄격하다. 잘못했으면 수치심을 느끼고 반성한다. 적당히 덮어줄 만큼 낯이 두껍지 않다. 염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최순실 사태’ 때 보수가 냉정하게 돌아선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조국 사태’ 때 눈 딱 감고 똘똘 뭉쳐 조국 편을 든 진보와는 다르다. 10일 윤석열 정부가 반환점을 돈다. ‘벌써 반 지났어’보다 ‘아직 반이나 남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불행한 일이다. 세 가지 실패를 바로잡지 않으면 순식간에 고립무원이 될 수 있다. “돌 맞고 가겠다”로는 위기를 재촉할 뿐이다.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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