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경영진은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반도체 정책의 향후 방향성을 두고 다양한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해 온 반도체법에 맞춰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전제로 테일러, 인디애나 등지에 생산라인 투자를 진행 중이거나 검토 중인 상황이다.
◇ 반도체법 비판했으나 폐지 가능성 낮아
2022년 8월 제정된 반도체법은 바이든 행정부의 중요 입법 성과로,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반도체 생산 보조금 390억달러(약 54조원)와 연구개발(R&D) 지원금 132억달러(약 18조원) 등 5년간 총 527억달러(약 73조원)를 지원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은 미국 본토에 최첨단 칩을 생산할 공장이 거의 없다는 위기의식에 더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관건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반도체법에 변화를 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앞서 트럼프 당선인은 현재의 반도체법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며 “정말 나쁜 거래”라며 “매우 높은 관세를 부과해 그들이 와서 반도체 공장을 제 돈 내고 설립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 해외 기업에 공장을 짓는 대가로 보조금을 주는 대신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그는 TSMC를 겨냥해 “우리 칩 사업을 훔친 곳에 오히려 돈을 주면서 공장을 지어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다만 트럼프 당선인이 반도체법을 아예 폐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애초에 반도체법은 트럼프 행정부 1기 말기에 제정된 2021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NDAA 2021엔 중국과의 기술 전쟁, 미국 내 반도체 산업 보호 등을 위한 조항이 포함돼 있다. 반도체법의 원류가 공화당에서 시작됐다는 얘기다. 반도체법으로 자국의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는 양당 합의가 이뤄져 있다.
또한 반도체법 도입으로 직접적인 혜택을 받은 지역 중에는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한 텍사스, 오하이오, 캔자스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다른 수혜 지역인 애리조나와 노스캐롤라이나는 경합주이지만 공화당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반도체법을 무효화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반도체법 시행 이후 전 세계 기업들이 미국 반도체 산업에 투자한 금액은 약 1660억달러(약 231조원)에 달해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혁중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미경제전문연구원은 “반도체법은 공화당에서도 지지하는 법안이기 때문에 폐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오히려 트럼프 당선인은 자국 우선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적인 법률을 제정해 다른 방향으로 반도체법을 끌고 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년 1월 20일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하기 전까지 반도체법에 따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기업들이 상무부와 계약을 마무리 짓지 못할 경우,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짓고 있는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삼성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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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SK하이닉스, ‘손익계산’ 따져 투자 규모 결정할 듯
트럼프 당선인과 관련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외적인 입장 표명을 피하고 있으나, 내부 실무진은 크게 동요하고 있지 않는 모습이다. 반도체법과 관련해서는 미 상무부과 공식적인 협상을 진행한 뒤 손익을 따져 대미 투자 규모 혹은 투자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는 것이 두 회사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450억달러(약 63조원)를 들여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약 38억7000만달러(약 5조4000억원)를 투자해 반도체 패키징 생산 시설을 건설할 계획이다.
우선 트럼프 정부의 경우 기존 바이든 정부에서 지원하기로 한 보조금 규모를 최대한 낮추는 방향으로 국내 기업을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4월 삼성전자에 반도체 공장 설립 보조금으로 64억달러(약 9조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고, SK하이닉스에는 지난 8월 패키징 생산기지 투자와 관련해 최대 4억5000만달러(약 63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다만 실사 평가 등이 남아있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아직 최종 계약서에는 사인을 하지 않은 상황이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와 해리스 모두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 자국 보호주의적 기조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 보진 않는다”며 “경영진이 세부적인 투자 조건과 보조금 규모 등을 살펴보고 득과 실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 역시 “인디애나에 설립 예정인 패키징 공장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정해지지 않았다”며 “만약 보조금 규모나 사업 여건이 불리하다면 당연히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또 반도체법의 변화 양상에 따라 국내 기업에 중장기적으로 손실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모두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경우 그만큼 현지 투자 의무와 고용 창출 등의 부담이 커진다. 특히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설립하는 삼성전자의 경우 이미 국내 생산라인 가동률을 50% 수준으로 낮춰야 할 정도로 수주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테일러 공장 설립이 수요에 맞지 않는 과잉투자가 된다면 보조금보다 더 큰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는 내부적 불안감도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꾸준히 강조해 오던 해외 기업에 대한 관세 부담이 현실화할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생산 단가 절감을 위해 현지 설비투자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김혁중 연구원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미국 현지 공장에 조달해야 하는 장비에도 수입 관세가 부과될 가능성이 있어 현지 생산 비용은 더 올라갈 것”이라며 “또 현지 반도체 공급망에서 미국산 요건을 강화할 것으로 보여 이 또한 국내 기업들엔 비용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민규 기자(durchman@chosunbiz.com);최지희 기자(h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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