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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토)

‘채식주의자’ 36초 요약, 영화는 2배속… 짧아서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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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넓고 얕게 지식 쌓는 ‘잡덕’의 시대

직장인 김잡덕(가명)씨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지난 주말 큰맘 먹고 소설 ‘채식주의자’를 봤다. 읽지는 않았고, ‘봤다’. 36초 만에. 책 표지만 본 것 아니냐고? 그는 본 김에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봤다. 41분 걸렸다. 표지만 보기엔 다소 긴 시간 아닐지. 김씨는 이날 12부작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와 ‘지옥’ 시즌1·2(총 12화)도 섭렵했다. 그뿐이랴. 지난달 놓친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전,란’과 극장에서 본 영화 ‘파묘’를 OTT로 한 번 더 봤다. 다시 말하는데 이 작품 모두를 단 하루 만에.

김잡덕, 그는 시간을 거스르는 자인가? 그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240시간인가? 아니다. 유튜브 요약 영상과 각종 OTT ‘배속 재생’ 덕에 가능한 일이다.

조선일보

유튜브에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소설과 영화 등을 짧게 요약해 놓은 영상이 많다. 이런 숏폼 영상마저 몇 배속으로 빨리 재생해 보기도 한다./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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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숏숏, 모든 게 짧아지는 시대다. ‘숏북’(숏+책) ‘숏드’(숏+드라마) ‘숏뮤’(숏+영화)…. 책을 다 읽는 대신 5분 혹은 더 짧게 압축한 요약 영상으로 보고, 16부작 드라마를 2~3시간으로 줄인 영상을 보는 것이다. 그마저도 길어서 1.5배속으로 빨리 재생한다. 전문가들은 “‘시성비’(시간 대비 효율)를 중시하는 현대인의 특징이 반영된 패스트 소비 현상”이라며 “본래 의도대로 책을 읽거나 영화·드라마를 봤을 때와 과연 동일한 효과를 주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N권 독서하고 웹툰도 요약

이번엔 진짜 종이책을 ‘읽는다’. 직장인 장모(32)씨 얘기다. 그런데 방법이 독특하다. 그는 퇴근 후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주인공 영혜의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30여 분 만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펼친다. 까만 건 글자요, 흰 건 종이라 이번엔 무지(無知)의 고통에 몸부림친다. 차라 형님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통 알 수 없어 억지로 20쪽을 채워 읽고, 이번엔 판타지 소설을 집는다. 다음은 존경해 마지않는 데일 카네기 선생님의 ‘인간관계론’, 마지막은 자기계발서.

장씨는 이렇게 2시간 만에 총 5권의 책을 읽었다. 그는 최근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책은 30~40분 등을 분배하고, 통 읽히지 않는 책은 페이지 수를 정해 읽는다. 장씨는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책과 상식으로 여겨지는 고전, 회사 생활에 도움되는 책 등 나름 고민해 골랐다”며 “책을 읽긴 해야겠는데 습관이 안 들어 읽는 속도는 느리고 시간은 없어 택한 방법”이라고 했다.

장씨처럼 하루 몇 시간의 시간 투자도 어려운 이들은 김잡덕씨처럼 영상 줄거리 요약본을 본다. “책을 펼친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읽은 사람은 없다”는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8분으로 요약해주고, 웬만한 베스트셀러 줄거리를 1~2분 만에 척척 떠먹여 준다니 시간 절약이 되긴 하겠다.

단순히 활자를 보기 싫어 영상을 택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닌 사람도 있다. 심지어 웹툰마저 요약(일명 ‘숏툰’)해 보는 현상으로 미뤄 보면 말이다. 유튜브에는 ‘7분 순삭, 웹툰 줄거리 한 방에 몰아보기’ ‘총 3부작인 1~63화 웹툰 2시간 정주행 요약’ 등의 게시물이 한가득.

◇잡덕 돼야 살아남는다?

결국 바쁘다, 바빠! 콘텐츠가 쏟아지면서 볼 것은 많은데 시간은 없다. 그러나 뭐라도 좀 알고 있어야 대화에 낄 수 있다. 한 가지에 몰입하는 ‘덕후’보다 여러 가지를 섭렵한 ‘잡덕’이 살아남을 것 같은 사회인 셈. 최근 인기인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시즌2는 공개 사흘 만에 23분짜리 요약 영상이 나왔다. 시즌1까지 합한 분량으로, 총 12부작인 시즌 1·2를 제 시간대로 보려면 약 12시간이 걸린다.

일정한 주기를 정해 순차적으로 공개되는 회당 1~2시간짜리 영상은 다음 날 동이 트기 무섭게 5~10분짜리 요약본이 나온다.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나 시리즈일수록, 요약본이 나오는 시간은 더 빨라진다. 직장인 김모(31)씨는 “전날 피곤하거나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하고 잤을 때 출근길 지하철에서 요약 영상을 본다”며 “물론 전체 영상에 비하면 아는 것에 차이가 있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알아야 대화에 참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요약본이 없거나 10여 분조차 길다고 느껴진다면? 1.5배속, 2배속으로 보거나 건너뛴다. 과거 배속 재생은 정보를 빠르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강(인터넷 강의)을 들을 때에나 사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줄거리에 몰입하며 흐름과 감정선을 따라가야만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마저 배속 재생을 한다. 유튜브·OTT에서 한글 자막을 제공하며 가능해진 일이기도 하다.

◇뒤처지지 않으려는 강박

이런 현상을 두고 ‘분초(分秒)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시간을 절약하며 알차게 써야만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대세를 따를 수 있다는 강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며 “넓은 범위의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순 있겠지만 책이나 영화를 즐기는 근본적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민현식 서울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는 “중장편 소설을 종이책으로 읽는 것은 긴 인내를 요구한다”며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앞서 읽은 것을 되새김질하며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책을 읽는 이유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님을 감안하면 영상 독서나 요약, 배속 재생 등은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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