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로마 왕실의 기둥에서 뱀이 나왔다. 기이한 징조였다. 이런 징조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공적인 일에 해당하고, 그 해석은 에트루리아 출신의 사제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아들들을 델포이의 신전에 파견했다. 왕은 이 사건을 사적인 일로 판단했지만, 이 판단은 국가를 공동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불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각자의 것은 각자에게(suum cuique)’라는 정의의 원리에 따라 공과 사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하는데, 왕의 판단은 이에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적인 일을 사적으로 처리한 왕이 타르퀴니우스였다. 이에 맞서 싸운 사람이 로마 공화정의 아버지인 브루투스였다.
“그는 먼저 그곳에서 인민의 맹세를 낭독했다. ‘누구든 왕이 되려거나 자유에 위험이 되는 사람이 로마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 이를 전력을 다해 지키고, 이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경시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는, ‘만약 나라 사랑이 앞서지 않았다면, 자신은 인간적인 이유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내키지도, 실제로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리비우스 <로마사> 2. 2. 5)
인용의 “인간적인 이유에서”라는 말에 눈길이 간다. 개인과 국가의 명확한 구분이 이 말에서 드러나기에. 브루투스에게 인간적인 고민을 제공한 사람은 그의 친구인 콜라티누스다. 하지만 그는 타르퀴니우스 왕가의 혈통이었다. 그런데, ‘타르퀴니우스’라는 이름은 인민에게는 나라의 적이었고, 자유의 위험을 뜻했다. 브루투스는 어쩔 수 없이 친구를 추방한다. “나라 사랑(caritas rei publicae)” 때문이었다. 공심이 사심을 이긴 사례이다. 사실, 브루투스의 공사 구분은 매우 엄격했다. 공화정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국익에 반해 음모를 꾸민 자신의 아들들까지 극형에 처했다. 사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공적으로 로마의 자유와 국가를 위한 박절했던 결단이었다. 국가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고뇌 어린 결정이었다. 이렇게 국가와 개인,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엄격한 구분을 통해 로마의 정체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는데, 브루투스의 매정했던 결정은 공화정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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