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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기억할 오늘] '위인' 프랭클린의 덜 알려진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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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벤저민 프랭클린의 다른 진실- 1
한국일보

벤저민 프랭클린의 사생활은 그가 남긴 명언록이나 위인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위키피디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아버지뻘인 벤저민 프랭클린(1706~1789)의 여러 공적인 면모와 달리 그의 사생활은 청소년용 위인전의 내용과 사뭇 달랐다. 위인전의 그는 근면 성실의 미덕을 실천한 상징적 청교도 개척자이지만, 실제로는 이익을 위해 명분을 꾸미는 데 능했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보다 성욕을 더 중시했다. 21세기 젠더 의식의 기준으로만 평가하자면, 그는 가루가 되도록 비난 받을 만한 난봉꾼의 전형이었다.

그는 영국 식민지 보스턴에서 양초를 만들어 팔던 영세업자의 17남매 중 15번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친모는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그는 달랑 2년 정규 교육을 받고 10세 무렵 아버지 가게 점원으로, 12세 때부턴 이복 형의 인쇄소 도제로 일을 배웠다. 독학으로 글을 익힌 그는 10대 시절 이복 형이 발간한 주간지에, 형 모르게 중년의 미망인인 양 가명으로 에세이를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고, 17세 때 도제 계약을 어기고 필라델피아로 도피, 훗날 부인이 되는 2년 연하의 데보라 리드(Deborah Read)와 연애를 시작했다. 주지사가 신문 제작용 장비를 구입하라고 지불한 돈을 들고 영국에 가서는 데보라와의 약속도 저버린 채 런던의 향락가를 누볐고, 1726년 귀국 후 출판업으로 사업을 시작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1732년 그의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 그가 쓴 절제와 근면, 진실 등 ‘13가지 덕목’에는 ‘순결’도 포함돼 있었다. “성행위는 오직 건강이나 자손을 위해 가져라. 도가 지나쳐 머리를 멍하게 하거나 몸을 쇠약하게 하거나 자신과 타인의 안녕과 평판을 해치는 일은 결코 없게 하라.”

“늙은 의사보다 늙은 주정뱅이가 더 많다”란 글도 연감에 있다. 교훈과 미담을 찾아내는 데 능한 이들은 저 글이 넓고 쉬운 길(알코올 의존)을 경계하라는 의미라고 설명하지만, 과연 그가 그런 뜻으로 썼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그는 당대 농부들의 유쾌한 웃음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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