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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광화문에서/하정민]美 대선에서 드러난 ‘캘리포니아 리버럴’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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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하정민 국제부 차장


미국 50개 주 중 인구가 가장 많고 경제 규모도 큰 캘리포니아주의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3조9000억 달러(약 5460조 원)다. 미국, 중국, 독일, 일본에 이은 세계 5위로 인도, 영국, 프랑스 GDP보다 많다. 천혜의 자연환경, 실리콘밸리, 할리우드, 스탠퍼드와 캘리포니아공대(칼텍) 같은 명문대를 두루 갖춘 덕이다.

이런 캘리포니아주가 인재 유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2022, 2023년에만 69만1000명이 떠났다. 테슬라 오라클 HP 팰런티어 등 쟁쟁한 기업도 본사를 다른 주로 옮겼다. 치안 불안, 과도한 규제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강요, 높은 세금과 비싼 생활비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많은 이가 그 시발점으로 2014년 주민투표로 통과된 ‘47호 법안’을 거론한다. 이 법안은 초범일 경우 950달러 이하의 절도, 단순 마약 소지 등을 경범죄로 다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감시설 부족, 주 재정 악화 등이 이유였지만 통과됐을 때부터 “범죄만 조장할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이후 10년간 주 곳곳에서 약탈과 마약이 판을 쳤다. 사상자만 발생하지 않으면 생계형 경범죄로 처리되니 범죄자 입장에선 거리낄 게 없다. 설사 붙잡혀도 보석금 없이 곧 풀려나는 사람이 태반이다. 시민 불만이 치솟았고 못 견딘 사람은 주를 떠났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47호 법안이 경범죄로 규정한 범죄를 다시 중범죄로 분류하자는 ‘36호 법안’을 발의했다. 5일 대선과 같은 날 실시된 이 법안의 주민투표는 69%의 지지로 통과됐다. 법이 죄를 벌하긴커녕 조장하는 현실에 넌더리를 낸 유권자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이 결과에서 보듯 미 진보 진영의 본산 겸 민주당 텃밭이던 캘리포니아주의 민심이 변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고향인 이곳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보다 20.5%포인트 높은 지지를 얻었다.

2016년과 2020년 대선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캘리포니아주 지지율은 트럼프 당선인보다 30.1%포인트, 29.2%포인트 높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정치 활동도 해온 해리스 부통령이 캘리포니아주에 연고가 없는 두 사람보다 훨씬 적은 표를 얻은 것이다.

해리스 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지방 검사,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등을 지낼 때 경찰 예산 삭감 등을 거론했다. 2020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도 대부분의 불법 이민자를 기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서 중도파 유권자를 의식해 화석에너지 등 일부 정책에서 ‘우클릭’을 시도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뼛속까지 진보 성향 정치인, 즉 ‘캘리포니아 리버럴’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인에게 전국 득표율, 대통령 선거인단 확보 숫자에서 모두 패했다. 민주당 역시 상하원,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에 완패했다. 해리스 부통령의 대선 패배 요인은 여러 개이고 모조리 그의 책임만은 아니겠으나 한 가지 시사점은 얻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리버럴’이 진보 성향의 일부 지역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미 전국 단위 선거에서는 더 이상 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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