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조선으로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352쪽 | 1만9800원
센자키항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로 향하는 조선인들. 역사비평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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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2월12일자 경향신문 사회면에 ‘알고도 모르는 척 경관! 친절 주간에 사망한 전재민 소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전재민 소부(戰災民 少婦)’란 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젊은 여성을 가리킨다.
기사에 따르면 전날 종로5가 효제동 골목에서 해방 후 고국에 돌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이 얼어죽은 채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경찰은 ‘동사가 걱정된다’는 시민의 신고를 받고도 이 여성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신마저 방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전재민 동사 사건은 흔했다. 이연식 일본 소피아대 교수가 쓴 <다시 조선으로>에 따르면, 1946년 12월 서울시 장충단의 전재민 수용소 재소자 2400명 중 1700명이 영양실조와 동상에 시달렸고 날마다 7~8명이 죽었다. 수용소 재소자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수용소에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의 운명은 더 혹독했다. 아사 또는 동사 위기에 처한 노숙자가 서울 시내에만 약 4000명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1947년 12월에는 만주에서 돌아왔으나 3주 동안이나 거처를 찾지 못해 남산공원에서 노숙을 하던 5세와 2세 어린이 두 명이 아버지 품에서 사망하는 가슴 아픈 사건도 벌어졌다.
일본 패전 이후 귀환한 전재민들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초래했다. 저자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 전 징용으로 끌려갔다 귀환한 사람들과 공산주의 정책 등에 대한 반발로 북한 지역에서 남한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포함한 남한 유입 인구는 대략 25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해방 직후 남한 인구(약 1600만명)의 약 15.6%에 해당하는 숫자다. 오늘날 웬만한 선진국도 감당하기 힘든 규모의 인구가 식민지배로 초토화된 땅에 불과 2~3년 사이에 밀려들었으니, 그 사회적 충격파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재민들을 절망하게 한 것은 해방된 조국의 열악한 환경이라기보다는 동포들의 냉대와 멸시였다. 해방 직후만 해도 전재민에 대한 ‘포섭·포용·동정·구호’를 강조했던 사람들의 시선은 1945년 12월~1946년 2월 동절기를 지나면서 ‘배제·경계·소외·방치·조롱’으로 변해갔다. 가뜩이나 식량과 일자리가 부족한데 대규모 전재민이 몰려들어 생활난이 심화되자 기존 주민들의 시선이 싸늘해진 것이다. “따라서 ‘전재민’이란 용어도 사회 일반의 동정을 촉구하는 본래의 취지와 달리 거꾸로 혐오를 더 깊이 각인시키는 사회적 낙인 기제로 작동했다.”
해방 후 남한이 전재민의 대량 이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혼돈에 빠진 배경에는 조선을 떠나기 전 남한 내 자산을 최대한 회수하려는 일본인들의 욕망, 미군정의 허술한 정책, 미군정이 중용한 친일파와 결탁한 남한의 모리배 집단의 탐욕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있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25일 일본인 사유 재산의 매매를 허용함으로써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생산시설 파괴, 비축 물자 폐기, 귀금속 및 문화재 반출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해방 후 혼란을 틈타 사욕을 채우려는 남한 기회주의자들은 명의도용과 문서위조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본인이 소유했던 가옥·점포·토지를 싹쓸이했다. 미군정이 뒤늦게 해방 이후 이뤄진 일본국 공·사유 재산 거래를 무효화하는 조치를 발표했으나, 단속을 위한 행정력이 턱없이 부족해 무용지물이었다. 미군정과 서울시는 적산가옥과 대형 요정을 개방해 전재민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빗발치자 개방을 약속했으나, 실제 시행을 계속 미룬 끝에 1947년 ‘사찰과 빈집’만 개방하기로 했다.
좌절한 전재민 중 일부는 또다시 고국을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1946년 봄부터 여름 사이 전재민들이 밀항선 등을 타고 만주나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사례가 속출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만주 재이민과 일본 재밀항 현상은) 해방 직후 신국가 건설의 열기라든가, 민족주의의 고조 속에서 한껏 물신화된 ‘국가’와 ‘민족’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먹을거리도 해결하지못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못한 조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중략) 그리고 이웃사촌이라고 믿었던 주변 사람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피를 나눈 동포’라는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헛된 신화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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