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국제부 차장 |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가 돌아왔다.”(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수정의 밤’은 유대인에겐 잊지 못할 날이다. 1938년 11월 9일 독일. 나치가 유대인 가게와 사원을 습격해 91명이 숨졌다. 그날 밤거리는 부서진 유리창 파편이 수정처럼 반짝였다고 한다.
아픈 역사가 언급된 건 7일(현지 시간)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집단 폭행 때문이다. AFC 아약스와 마카비 텔아비브 FC의 유럽축구연맹 유로파리그(UEL) 경기 뒤 이스라엘 원정팬들이 거리에서 린치를 당했다. 30명 이상 다쳤고 중상인 5명은 병원에 실려갔다.
정황을 보면, 이 사건은 축구 탓이 아니다. 아약스가 5 대 0으로 이겨 홈팀이 열받을 리 없다. 이스라엘 정부는 즉각 “친(親)팔레스타인 아랍계 이민자들”을 가해자로 지목했다. 딕 스호프 네덜란드 총리도 “반유대주의 폭력 행위”로 규정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까지 “비열한 짓”이라 성토한 사태. 한데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영국 가디언은 12일 “낌새가 상당했지만 각 정부 당국 등이 간과해 사태를 키웠다”고 전했다. 시간을 되돌려, 어쩌면 이번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3번의 기회’를 살펴보자.
①시합 몇 주 전=네덜란드는 아랍계 이민자가 20만 명이 넘는다. 가자 전쟁 발발 뒤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도 줄기찼다. 이에 일부 이스라엘 극렬팬들은 몇 주 전부터 소셜미디어에 적의를 드러냈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스라엘군 만세”라며 분탕질도 모의했다.
축구는 훌리건(hooligan) 역사가 깊다. 때문에 사고 칠 기미가 보이면 경기장 입장을 막고 24시간 감시한다. 영국 등은 악성 팬을 흉악범 취급해 출국부터 불허한다. 반면 이스라엘 정부는 어떤 조치도 없었다.
②시합 이틀 전=우려는 현실이 됐다. 암스테르담 경찰에 따르면 5일 몇몇 이스라엘 팬들은 “팔레스타인에 죽음을” 등을 외치고 다녔다. 시내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찢고 불태웠다. 여러 아랍계 택시 기사가 손찌검을 당했다. “가자엔 학교가 필요 없지. 아이들이 (죽어서) 없거든”이란 노래를 합창하는 모습이 틱톡에 올라왔다.
이때 공권력이 강력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심지어 세헤르 칸 암스테르담 시의원은 “이슬람 커뮤니티가 분노했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그러나 시 당국은 “개인적 일탈”로 치부했다.
③시합 날=칸 의원 경고대로 아랍계는 들끓었다. 중동 출신이 많은 택시노조는 항의 집회를 열었다. 온라인에선 이슬람 청년들의 보복 맹세가 잇따랐다. 오토바이로 ‘치고 빠지는(hit and run)’ 수법까지 사전 공유됐다. 그런데도 원정팬 보호장치는 헐거웠다.
같은 날 손흥민 소속팀 토트넘 홋스퍼 FC와 갈라타사라이 SK의 UEL 이스탄불 경기는 달랐다. 영국 관중은 축구장에서 10여 km 떨어진 곳에 모여 경찰 호위 아래 전세버스로 이동했다. 출입구와 매점, 화장실도 홈팬들과 따로 썼다. 관람석은 투명 벽으로 차단됐다. 종료 뒤엔 튀르키예 쪽이 다 떠날 때까지 대기시켰다. 이후 버스로 탔던 장소에 내려줬다.
폭력을 옹호할 맘은 없다. 범죄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다만 관계 기관들이 미리 대처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아놓고, 남 탓 하는 위정자들은 그만 보고 싶다. 인재(人災)는 언제나 예고편이 쏟아진다. 그걸 묵살한 대가는 선량한 이들이 떠안는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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