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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미디어세상]이념에 절고 전략에 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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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만사인 민주정에서 살다보면 이런 일을 당한다. 이념이니 정체성이니 앞세우고, 전략이니 정책이니 떠들던 자들도 일제히 입 다물고 국민 선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한국의 민주화세력은 2012년 대선에서 단일후보가 나서고도 패하면서 씁쓸하게 결과를 수용해야만 했다. 멀게는 야권 단일화 없이도 이길 수 있다며 분열하여 참패한 1987년 대선 때도 그랬다.

미국 민주당은 2000년 고어와 2016년 힐러리가 대선에서 각각 속절없이 패배하면서 현실을 점검할 기회를 가졌다. 그래도 이번 해리스의 패배는 몹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고어와 힐러리는 투표자로부터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인단 확보에 실패했지만, 해리스는 박빙으로 붙어 싸웠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완벽히 진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거가 만사라면 패배를 통해 배워야 한다. 모두 이념에 절고 전략에 찌든 각자 생각을 내려놓고 유권자의 선택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번 해리스의 패배가 심란한 이유는 유권자의 표심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어서다.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이 원인이 아니라느니, ‘정치적 올바름’은 선거 사안도 아니었다느니, 결국 후보 자체가 문제라느니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대패한 결과를 두고서 설명은커녕 현실인식 자체가 안 되는 형국이다.

그나마 출구조사 결과가 도움을 준다. 에디슨 조사대행사의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지난 10월 말과 11월 초 미국 언론과 여론조사 전문가, 그리고 캠페인 전략가들이 떠든 말들 중에 그나마 어떤 게 민심을 반영한 것이었는지 평가해 볼 수 있다.

첫째, 진보 대 보수의 양극화 심화 가운데 중도성향 투표자의 향배가 선거결과를 결정했다. 2024년 투표자의 42%가 중도 유권자였는데, 이들 중 57%가 민주당을 선택했다. 이는 2020년 중도성향 유권자 중 바이든이 벌렸던 격차에서 무려 13%포인트 감소한 결과다. 민주당은 이념적 자유주의자들을 더 많이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중도파를 잃고 있다.

둘째, 경제가 나쁘다는 인식이 투표를 갈랐다. 투표자 중 미국 경제가 나쁘다는 응답이 68%에 달했는데, 이 중 70%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마찬가지로 물가상승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응답한 이들이 전체 투표자의 75%에 달했는데, 이들 중 60%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객관적 경제지표나 민주당 정책이 나쁘지 않았다는 해석과 별도로 유권자들의 현실인식은 냉엄했던 것이다.

셋째, 인종과 종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투표자 중 기독교인이 42%인데, 이들 중 63%가 트럼프를 선택했고,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투표자들 중 71%는 해리스를 선택했다. 기독교인의 트럼프 선호 경향은 백인일 경우 더욱 뚜렷했다.

넷째, 출구조사는 유권자의 불만과 정서도 물었는데, 현실에 불만을 갖고 분노하는 다수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선택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간절히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는 해리스 지지자라기보다 트럼프 지지자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절이란 미래가 아닌 과거의 미국이라는 데 있다.

실로 냉정하게 민주당이 이번에 왜 졌는지 알기 원한다면,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을 찍은 8100만 미국 유권자 중 어째서 무려 700만명 이상이 해리스를 저버렸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020년 민주당을 택했지만 이번에 공화당으로 돌아섰거나, 정반대로 행동했던 교차투표자들을 상계하고서도 그렇다. 불행히도 이들은 출구조사로도 잡을 수 없다. 따라서 향후 현명한 방법으로 자료를 수집해 타당하게 추론해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념에 절고 전략에 찌든 머리들마저 설득할 수 있으려면 역시 결정적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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