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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CQD와 SOS… 타이태닉 침몰엔 과학이 숨기고 싶은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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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그래픽=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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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4월 15일 새벽 대서양을 지나는 선박들에 다급한 모스 부호가 전해졌다. “빙산에 부딪혔다. 즉시 와달라. CQD.” CQD는 마르코니사(社)가 정한 구조 요청 신호. CQ는 “모두에게 전한다”라는 통신 용어, D는 재난(distress)을 의미한다. 발신지는 타이태닉호였다. 무선실에 배치된 마르코니의 엔지니어들은 필사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심지어 승객과 승무원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오보가 전해졌다. 무선 통신으로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1909년 노벨상을 받은 지 불과 3년 뒤의 일이다. 타이태닉 사고에는 과학이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1887년 독일 물리학자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가 전자기파를 만들자, 이를 무선 통신에 이용하려는 경쟁이 시작된다. 해저 케이블은 너무 비쌌기에 사업성을 내다본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때 독일의 칼 페르디난트 브라운은 마르코니의 무선이 멀리 못 가는 문제를 해결했지만, 특허를 내는 데는 주저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브라운의 기술을 도입한 마르코니는 경쟁에서 승리할 이벤트를 생각했다. 무선 신호를 대서양 너머로 전달하는 것이다. 당시 과학자들은 수평선 너머, 즉 100~200km 이상 전파는 전달되지 못한다고 믿었다. 모두가 망설일 때, 1901년 마르코니의 도전이 성공한다. 이후 마르코니와 브라운의 특허 분쟁이 시작되었다. 1903년 독일 정부는 브라운을 중심으로 텔레풍켄(Telefunken)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대응하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무선통신이 재난 구호에 사용되자, 1904년 마르코니는 유선 통신에 쓰이던 CQD를 구조 신호로 선택했다. 하지만 CQD에 해당하는 모스 부호는 다른 단어와 헷갈릴 우려가 있었다. 독일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SOS라는 신호를 제안한다. 짧은 음 3개, 긴 신호 3개, 다시 짧은 음 3개로 이루어진 “· · · — — — · · ·”는 다른 단어와 충돌이 없도록 고안된 기호이므로, CQD와 달리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08년 국제기구는 독일의 SOS를 재난 신호로 채택하지만, 독일의 브라운과 대립하던 마르코니는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1909년 노벨물리학상은 마르코니와 브라운 두 사람으로 정해졌다. 마르코니가 유명했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브라운의 공로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그러나 공동 수상은 경쟁을 끝내지 못했다. 무선 시장을 독점하려던 마르코니는 호화 여객선에서 육지와 실시간 소통하는 상품을 만들었다. 1912년 타이태닉에 설치된 마르코니 전신은 그 결과물이다. 무선실에 고용된 두 명의 엔지니어는 24시간 밤낮으로 부유층 고객들의 사소한 무선을 담당했다. 통신량은 엄청났고, 심지어 포커 게임을 알려달라는 주문까지 있었다. 타이태닉 바로 옆 선박의 무선사가 빙산을 주의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눈코 뜰 새 없었던 두 사람은 오히려 그를 질타했고, 마음이 상한 무선사는 무전기를 끄고 잠들었다.

몇 시간 뒤 빙산에 충돌하자 타이태닉의 무선은 구조 신호로 바뀌었다. 그러나 답은 느렸다. 어떤 독일 선박은 타이태닉의 CQD에 한참이 지나서 답했다. 무선 독점 경쟁이 빚어낸 독일 텔레풍켄 무선사들과 마르코니 무선사들의 반목 때문이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타이태닉은 CQD와 함께 SOS도 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선으로 전파된 메시지의 혼동이 문제였다. 타이태닉호의 목적지를 묻는 질문은 여러 전송 경로를 거치며 타이태닉호가 목적지로 가고 있다고 왜곡되고, 중간에 끼어든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이를 재생산했다. 무선실에 물이 차오르는 최후의 순간까지 무전을 보냈지만 구조는 늦었다.

전원 구조가 참사 소식으로 바뀐 건 사고 당일 늦은 밤이었다. 충격에 빠진 미국 정부가 조사위원회를 꾸리자, 마르코니는 이 사건이 무선 독점 경쟁과 관련이 없다고 변명해야 했다. 마르코니의 무전이 생존자들을 구출했다는 점은 분명했기에, 모든 선박에 24시간 무선 통신이 의무화되며 통신 산업은 오히려 급성장한다. 대신 통신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도 마르코니와 브라운은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 브라운은 마르코니의 미국 회사와 소송으로 미국을 방문했다가, 1차대전에서 미국과 독일이 교전국이 되면서 구금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18년 미국 브루클린에서 67세로 사망했다.

브라운은 무선 통신에 앞서 음극선관(CRT·Cathode Ray Tube)을 발명했다. 브라운의 CRT는 나중에 ‘브라운관’이라 불리며 TV와 디스플레이 혁명을 이끌었지만, 정작 브라운이 무선 통신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7년 마르코니는 미국 의회 연설에서 타이태닉호의 비극이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극우 세력이 집권하자 이번에는 파시스트가 되어 무솔리니에게 협력했다. 마르코니는 2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7년 사망했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작년 잠수정을 타고 수심 4000미터에 가라앉은 타이태닉호를 보려던 사람들이 전원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다. 이처럼 100년도 지난 참사가 아직도 관심을 끄는 이유는, 한때 기술을 과신했고, 그래서 서로를 배척하며 탐욕에 거리낌 없던 시대가 어떤 비극을 맞았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 관계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정치가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이 시대, 과학마저 공존의 가치를 망각한다면 어떤 파국을 초래하는지 이미 인류는 충분히 경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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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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