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4개월 앞 ‘AI 디지털 교과서’ 선도학교 곳곳 혼란
“어떻게 써요?” “펜 인식 안돼요”
수업 중간중간 기기 먹통 되기도
이주호표 ‘맞춤 수업’ 퇴색 우려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실. ‘디지털 선도학교’로 지정된 이 학교에선 5학년 학생 25명이 태블릿 기능을 갖춘 노트북으로 수학 수업을 받고 있었다. 담임교사 박모 씨(28)가 디지털 펜으로 도형 그리는 법을 먼저 알려준 뒤 학생들이 스스로 실습을 시작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아우성이 들렸다. 학생들은 “펜 인식이 안 돼요” “각도기는 메뉴 어디에 있나요”를 외치며 교사를 찾기 시작했다. 한 학생은 디지털 기기 사용에 지쳤다는 듯 연필로 종이에 슥슥 도형을 그리더니 “차라리 이걸로 대신 하면 안 돼요?”라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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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내년 3월 1학기부터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를 전국 초등학교 3, 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대상 영어, 수학, 정보 수업에 도입한다. 디지털 교과서는 AI 프로그램이 탑재된 태블릿 등을 통해 개인 맞춤형 학습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대표 정책이다. 학생의 학습 데이터를 분석해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교육을 제공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 과의존과 문해력 저하 등이 우려된다”며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취재팀은 디지털 선도학교로 지정돼 미리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 한 초교의 수업 3개를 참관했다. 그 결과 수업 내내 기기의 오류와 사용법의 문제, 학생들의 집중력 저하 등 문제가 잇따랐다. 수업 중간중간 기기가 먹통이 돼 수업 흐름이 끊기거나, 학생들이 교사 몰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접속해 딴짓을 하는 장면도 포착됐다. 수업을 진행한 교사 김모 씨(51)는 “천천히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사고력도 커지는데 태블릿 등을 사용하면 생각하지 않고 너무 빨리 답을 얻어버려 쉽게 딴생각에 빠진다”고 말했다. 다른 교사와 학부모들도 학생들의 사고력, 문해력 저하를 우려했다.
집중 잘 안되는 AI교과서… “뭘 읽었나 물으면 ‘몰라요’ 답변”
내년 3월 ‘AI 교과서’ 수업
“디지털 수업, 사고-문해력 저하 우려… 교사마다 준비 상황 달라 학습 편차”
부모들도 “유보” 국회청원 잇따라… 美서도 “기초학력 저하” 도입 철회
디지털 선도학교로 지정된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지난달 29일 오전 태블릿 기능을 갖춘 노트북을 활용한 ‘디지털 교과서’ 수업이 진행 중이다. 내년 새 학기부터 전국의 초중고교에서는 이 같은 수업이 단계적으로 도입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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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선도 학교인 또 다른 서울의 초등학교도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 학교 교무부장 김모 씨(50)는 “디지털 태블릿은 답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어 학생들이 본인의 답에 대한 근거를 생각할 시간이 줄어든다”며 “아이들이 몇 문제 풀고 틀렸다고 뜨면 답만 확인하곤 다시 문제를 풀어 100점을 만든다”고 말했다. 디지털 교과서로 학습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사고력을 발휘할 여지가 줄어들었다는 취지다.
● 졸속 도입에 교사-학부모는 우려
당장 3월부터 디지털 교과서를 사용해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들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서울교사노동조합이 9월 교육부의 AI 디지털 교과서 관련 연수에 참여한 교사 17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94%가 “디지털 교과서 전면 도입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 연수에 참여한 고교 교사는 “애들한테 인터넷으로 글을 읽고 방금 뭐를 읽었냐고 물어보자 ‘모르겠다’고 하더라”라며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디지털로 읽은 건 금방 기억에서 사라져 휘발성도 강하다”고 주장했다.
현장에서의 준비 부족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디지털 교과서 실물은 발표 예정 시기가 당초 계획보다 3개월가량 늦어져 이달 말 공개 예정이다. 강원의 한 초교 교사 조모 씨(28)는 “당장 내년 3월부터 시행이지만 초등학교 3, 4학년 담임선생님이 누가 될지는 개강을 앞두고 결정된다”며 “그렇다 보니 디지털 교과서 연수를 굳이 방학 때 시간을 내어 들으려는 선생님이 없다”고 말했다.
교사마다 연령, 디지털 기기 능숙도, 준비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반별 학습 수준 편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북의 한 초등교사 박모 씨(37)는 “기본적인 진단 학습은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걸 나눠 주더라도 디지털 교과서가 학생 수준을 판단해 주면, 교사들은 거기에 맞게 개별화된 학습지를 줘야 한다”며 “교사가 그 기능을 사용할 줄 모르면 학생은 사실상 기본 학습만 받고 끝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부모들 역시 디지털 교과서 도입에 우려를 나타냈다.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을 유보해 달라’는 국회의 국민동의청원에 한 달 만에 5만6505명이 동의했다. 초2 딸을 키우는 장모 씨(34)는 “영어 과외를 받을 때 지켜보니 애가 옆에 노트북, 스마트폰이 있으면 집중을 못 하고 계속 보려 한다”며 “AI 교과서 도입 반대하는 국회 청원 동의도 했다”고 말했다. 초3 아들을 키우는 허모 씨(40)는 “집에서도 아이들한테 수학, 영어, 국어는 다 종이책으로 된 학습지를 풀게 한다”며 “굳이 학교에서까지 미디어 노출 시간을 늘려야 하냐”고 물었다.
● 美 도입 실패 사례도, 전문가들 “전면 확대 부적절”
해외에서는 디지털 교과서를 선제적으로 도입했다가 실패한 사례들도 있다. 구글 엔지니어 맥스 벤틸라가 2013년부터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한 대안학교 알트스쿨(Altschool)은 ‘종이 교과서가 없는 학교’였다. 학생들은 학교에 비치된 아이패드와 노트북만으로 수업을 받도록 했고, 이 같은 학교를 총 9곳에 지었다. 하지만 벤틸라는 “AI 알고리즘으로 설계된 학습이 기초학력 저하를 가져왔다”고 밝혔고 학부모들의 우려, 학생 이탈이 이어진 끝에 결국 2019년에 모두 문을 닫았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도 유치원생 등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교육을 중단하는 추세다. 권정민 서울교대 인공지능융합 교수는 “AI 디지털 교과서를 전면 확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며 “사고력이 필요한 수업에서 디지털 교과서로 응용문제만 풀게 하는 건 결국 기계처럼 문제 풀이만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지적했다.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김다연 인턴기자 경희대 경영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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