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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세계 화장실의 날’ 누군가는 목숨 걸고 가는 곳이라니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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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계 화장실의 날’ 로고.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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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 옥스팜 캠페인&옹호사업팀장



어린 시절 화장실 귀신 이야기를 들었다. 화장실에는 귀신이 살고 있어서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를 물어보는데 어떤 색을 선택해도 결국 귀신이 나타난다는 내용이었다. 가끔 친구들과 모여 어떻게 하면 화장실 귀신에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아이디어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화장실 귀신 이야기는 왜 생겨난 것일까? 관련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하수도 보급률은 1980년대 초 겨우 6%에 불과했고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절반을 넘었다. 수세식 화장실 설치율도 매우 낮아 1985년 기준 세 집 중 한 집만이 수세식 화장실이었고 2000년까지도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지 못한 주택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은 위생적이지 않은 곳,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된 곳이었다. 특히 체구가 작은 아이들이 자칫 빠지기라도 한다면 바로 생명이 위험해지는 곳이 화장실이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귀신을 만날까 봐 경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사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귀신 이야기를 만들어냈을지 모른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과 건물에 수세식 화장실이 갖추어진 현재, 화장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위험해질까 봐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 화장실은 생명의 위협이 되는 곳, 때로는 목숨을 걸고 가야 하는 곳이다. 전 세계 슬럼 지역 인구의 68%가 공용 화장실에 의존하고 있다. 5분 거리의 공용 화장실을 갈 때 강간이나 성폭행을 당할 위험이 있고, 인도에서는 가정용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는 여성의 성폭력 위험이 최대 2배까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화장실에 갈 때 깨진 유리병을 손에 들고 간다는 인도 소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전 세계 여성의 3분의 1이 아직도 안전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고 4억1900만명이 노천 배변을 하고 있다.



전쟁과 기후위기는 화장실을 위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가자 지구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옥스팜이 설치한 식수·위생 시설 32개 중 12개가 파괴되었고 11개가 손상되었다. 폐수처리장이 파괴된 후 하수가 도시에 범람했고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생활하면서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 위험이 커지고 있다. 화장실 공포는 옛날 옛적 이야기, 괴담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우주여행도 가는 시대이지만 더러운 화장실로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매일 700명에 달한다.



유엔은 화장실의 중요성을 알리고 전 세계가 위생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11월19일을 ‘세계 화장실의 날’로 지정했고 2030년까지 모든 사람이 깨끗한 물과 위생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올해 ‘세계 화장실의 날’ 주제는 특별히 ‘화장실, 평화를 위한 공간’이다. 평화 없이 화장실이 유지될 수 없고, 화장실 없이 평화로운 일상도 불가능하다.



아이들이 화장실에 간다고 해서 죽음의 위협을 겪어서는 안 되고, 아이들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는 화장실 귀신은 옛날 옛적 이야기,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만 살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11월19일을 함께 기념하며 우리 주변의 화장실 문제를 함께 살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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