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18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의료센터 앞에서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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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 관절염을 앓아온 80대 ㄱ씨는 수년 전부터 병원에서 인공관절 수술을 권유받았지만 병원비 걱정에 선뜻 치료를 받지 못했다. 건강보험을 적용받고도 ㄱ씨가 부담할 병원비가 400만원이었다. 수술에 온갖 ‘비급여’ 진료를 더해 1천만원의 진료비가 나온다는 대학병원도 있었다. 진통 주사 등으로 버티던 ㄱ씨는 무릎 연골이 대부분 닳아 걷기가 어려운 지경이 돼서야, 자녀에게 병원비를 부탁해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를 진료한 의사는 “건강보험 제도가 있는 대부분 나라에선 무릎 인공관절 수술에 환자 부담을 물리지 않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진료비 20%가 본인부담으로 발생해 치료를 포기하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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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의료개혁을 위해 의대 정원 증원과 함께 상급병원 구조 전환 등을 통한 필수·지역의료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의료제도의 ‘고질병’인 낮은 건강보험 보장률은 그대로 둔 채, 일부 정책이 환자의 병원비 부담을 늘리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의료개혁이 공적 보험 보장 범위를 넓히고 비급여 난립을 막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낮은 보장률 개선은 없고
19일 최보윤 국민의힘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은 ‘건강보험 현황’ 자료를 보면, 2022년 국내 전체 의료비 지출에서 건강보험 급여가 차지하는 비중(보장률)은 64.5%였다. 건강보험 보장률은 2013년 62.0%에서 2020년 65.3%로 올랐다가, 2021·2022년에는 각각 64.5%로 다시 떨어지는 등 9년 새 2.5%포인트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는 다른 선진국 공적 보험의 의료비 보장률과 견줘 가장 낮은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회원국 평균 보장률은 76%(2021년 기준)였다. 관련 자료를 제출한 36개국 가운데 한국보다 보장률이 낮은 나라는 브라질(41%)뿐이었다.
한국의 보장률이 늘지 않는 건 ‘비급여’ 진료가 빠르게 늘면서다. 2013~2022년 건강보험 가입자들이 비급여 진료에 쓴 돈(건보공단 추산치)은 11조2천억원에서 17조6천억원으로 1.6배로 불었다. 건강보험 재정 지출을 늘려도, 비급여 때문에 전체 진료비가 불어 보장률은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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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건강보험 사각지대인 비급여 진료비를 실손보험 등을 통해 메우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실손보험 가입자는 3997만명으로 2015년(3266만명) 대비 22.4% 늘었다. 같은 기간 실손보험이 지급한 보험금은 5조5천억원에서 14조1천억원으로 2.6배 뛰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약한 상황에서 환자는 의료비 부담을 줄이려고 실손보험에 가입하고, 다시 병원이 비급여 진료를 권해 의료비 지출은 더 커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실손보험이 의료비를 줄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월 10만원 안팎의) 보험료를 고려하면 가계에 지우는 부담이 상당하다. 특히 60살 이상 고령자에 대해서는 보험료가 오르는 경우가 많아 더욱 부담스럽다”고 설명했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처장은 “비급여의 급여화 등을 통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 오이시디 평균보다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것보다, 보장률이 현저히 낮다는 게 한국 의료의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문재인 정부 시절 내건 ‘보장률 70% 달성’ 목표를 사실상 폐기했다. 건강보험 급여화로 환자 부담이 줄면, 환자들의 ‘의료 남용’이 쉬워져 건강보험 재정이 악화된다는 논리에서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월 발표한 제2차 건강보험 종합계획에서 “급격한 보장성 확대로 인한 (환자) 본인부담 감소는 상급병원 이용 문턱을 낮춰서 수도권 대학병원 선호, (환자) 쏠림을 심화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하은진 서울대병원 교수(신경외과)는 “‘보장성 확대로 의료가 남용된다’는 정부 해석은 틀렸다. 상급병원 진료 문턱이 낮아진 건 실손보험 가입 급증과 (건강보험에 등록된 진료권에서만 진료받는) 진료권 제도 폐지 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대형병원엔 연 3조 ‘통 큰 투자’
정부 의료개혁은 환자 부담을 낮추는 대신 병원에 대한 보상(수가)을 높이는 데 건강보험을 집중 투입하기로 했다. 필수의료 진료 가격을 높여 병원이 이런 진료를 더 많이 공급하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의대 증원에 반발하는 의사들과 전공의 이탈로 경영난을 겪는 대형병원에 대한 ‘당근’의 성격도 깔려 있다.
대표적으로 정부는 대형병원이 경증 환자 진료를 줄이고 중증 환자를 많이 보도록 유도하는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사업을 진행 중이다. 상급병원마다 병상을 최대 15% 줄이고, 중증 환자 진료 수가를 인상하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이 사업에 건강보험 재정이 연 3조3천억원 투입된다. 지난 9월부터는 경증·비응급 환자가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 등 대형병원 응급실을 이용할 때 본인부담률을 기존 50~60%에서 90%로 올리기도 했다.
이런 조처는 환자에겐 부담을 더욱 높이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환자가 자신의 중증도를 모른 채 상급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경증’으로 분류돼 높은 본인부담금을 물 수 있다. 환자가 중증인지 우선 판단해줄 1·2차 의료기관의 주치의 제도 등도 없기 때문이다. 6인 병실 등 다인실을 줄이는 방식의 병상 축소 역시 입원료 부담을 키운다. 연간 진료비가 일정액을 넘어가면 환급해주는 ‘건강보험 본인부담 상한제’가 3인 이하 병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수도권 한 상급병원 원장은 “(구조 전환 사업) 참여 병원들은 병상을 줄이는 대신 연 수백억원 인센티브를 받게 되니 환영”이라면서도 “높은 입원료를 감당할 여유가 되는 사람만 상급병원에 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민의 보편적 건강 증진에 쓰여야 할 공적 보험의 재정을 몇몇 대형병원의 구조조정에 붓는 데 대한 비판도 이어진다. 정형준 사무처장은 “연 3조원은 (병원 간호인력이 환자를 상시 돌보는)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를 전면화해 과도한 간병비 지출을 해결하거나, 공공병원이 없는 지역 20여곳에 병원을 세워줄 만한 액수”라며 “이 돈을 의료 공급자의 (병상 감축) 손실을 메우는 데 몰아주는 건 건보 제도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보장성 강화가 우선”
전문가들은 의료개혁이 건강보험 보장률을 끌어올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건강 개선 효과가 적은 비급여 진료를 통제해 전체 의료비 지출을 줄이는 게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정부는 다음달 발표할 ‘의료개혁 2차 실행방안’에 비급여 관리 계획을 담을 예정이다. 급여·비급여 혼합 진료에는 건강보험 급여 청구를 금지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된다. 다만 정부는 의료계 반발을 우려해 도수치료처럼 의학적 필요가 입증되지 않은 일부 비급여 진료에만 이런 조처를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김진현 교수는 “한국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혼합진료를 허용하는 나라”라며 “이를 전면적으로 금지해 비급여 진료의 진찰료 등에 대해서도 건강보험 적용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실손보험이 비급여는 물론 건강보험 진료의 환자 본인부담 진료비까지 내줘 진료 남용을 부추기고 있어, 실손보험 통제 방안 역시 동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환자 생명에 필수적인 비급여 진료를 급여화하고, 본인부담률을 더욱 낮춰야 한다는 주문도 이어진다. 하은진 교수는 “대개 월 300만원에서 700만원에 이르는 중환자실 진료비는 보통 소득의 가구에도 부담스럽다. 더욱이 중증 환자는 치료 후에도 (후유증으로) 일상 복귀가 어려워 평생 경제적 부담을 안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질환에 대한 건강보험 보장률은 상당히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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