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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전문가 칼럼] 캐논의 특허 경영이 주는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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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미국 시장에 가장 많은 특허를 내놓는 일본 기업은 어디일까? 세계 최대 완성차 기업, 도요타? 인공지능(AI)으로 부활하는 소니? 아니면 손정의의 소프트뱅크? 답은 ‘캐논(Canon)’이다. 지난 19년간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놓질 않고 있다. 그저 사진기 팔고, 프린터 렌탈해주는 업체로만 알던 회사, 이 캐논의 속살을 그들의 특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캐논은 총 2890건의 특허를 미 특허청에 등록시켜 삼성전자와 퀄컴, TSMC, IBM에 이어 5위 자리에 올랐다. 캐논은 무려 지난 38년간 상위 5위권 밖으로 밀려나 본 적 없는 ‘미국 특허’에 진심인 기업이다.

미국 말고도 캐논은 전 세계에 약 20만 건의 특허를 보유 중이다. 이를 국가별로 추리면 자국 일본에 가장 많은 특허를 출원하고 있다. 전체 보유 특허의 거의 절반에 가깝다. 다음으로는 미국, 중국, 유럽, 한국 등의 순이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캐논은 영국이나 독일, 러시아 시장 대비, 한국을 약 5배 가량 더 비중 있게 보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막 시작될 즈음인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정기 광학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캐논이 처음부터 특허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다. 사진기용 렌즈를 만들어 니콘과 같은 기존 카메라 업체에 주로 납품하던 캐논은, 자신의 렌즈를 장착해 직접 필름 사진기를 만들면서 완제품 제조업체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다 창업 20여년이 지나 1960년대 들어 ‘복사기’ 시장에 진출한다. 문제는 당시 전 세계 프린터 시장을 미국 제록스가 꽉 잡고 있었단 거다. 제록스의 높고 두터운 특허 장벽 앞에서 절치부심하던 캐논. 하지만 자신들만의 수십년 카메라 렌즈 기술을 십분 활용, 전자사진 기술인 ‘NP방식’의 프린팅 기법을 독자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관련 특허도 곧바로 취득했다. 이렇게 미 특허청에 1965년 등록 완료한 게 바로 ‘사진인쇄 장치’라는 특허다. 이를 통해 캐논은 1969년 첫 프린터 제품을 미국 시장에 내놓게 된다. 차별화된 독점 기술과 특허의 확보는 신제품 출시에 그치지 않았다. 관련 업체들로부터 기술 라이선스 비용까지, 따박따박 앉아서 버는 일이 속속 생기게 된 거다. 캐논 DNA에 특허가 뿌리 깊게 각인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때부터다.

캐논 특허 중 가장 인기 있는, 즉 후행 특허에 제일 많이 피인용된 특허는 무엇일까. 지난 2015년 미 특허청에 출원된 ‘이동 방사선 촬영장치 및 무선통신용 이동 방사선 발생장치’라는 특허다. 방사선 촬영기와 평면패널 검출기 간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했다는 게 이 특허의 핵심이다. 거동 불편 환자가 방사선실까지 이동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게 해주는 등 메디컬 디바이스 시장에 큰 획을 그은 기술이란 평가다. 이 특허는 모두 291건의 후행 특허로부터 인용 받았다. 미국 GE를 비롯해 히타치, 후지필름 등 주요 의료기기 업체들이 이 특허를 들여다봤다.

그럼, 캐논의 특허를 가장 많이 눈여겨 본 기업은 어디일까? 일본 기업 ‘후지’다. 총 1135건의 자사 특허 출원에 캐논 특허를 참고·인용했다. 다음으로는 삼성과 리코, 소니, 도시바, 코니카 등의 순이었다. 특허 인용·피인용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해당 업체간 기술적 종속 관계와 그에 따른 향후 연구개발(R&D) 방향이나 신기술 관련 정책기조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스마트폰 촬영이 대세인 요즘, 틸팅 뷰파인더나 카메라 본체 햅틱 피드백 등 카메라폰 기술과 함께, 캐논은 여전히 아날로그 광학기술의 총아, ‘렌즈’에 천착한다. 절대 물량이 많은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매년 300건가량의 렌즈 관련 핵심특허를 꼬박꼬박 내고 있다.

2024년 9월 일본 특허청에 출원된 ‘줌렌즈 및 촬상 장치’라는 특허는 디지털 줌잉이 일상화된 스마트폰 시대에도, 캐논은 우직하게 크고 두꺼운 여러 개의 볼록렌즈를 어떻게 배치하고 조작할지 연구한다. 이렇게 개발된 렌즈 기술은 카메라는 물론, 디지털 프린터나 의료기기, 산업용 광학기기 등에 폭넓게 적용되고 장착된다.

결국, 이 같은 렌즈 기술은 영상과 의료, 인쇄, 산업장비 등 총 4개 그룹으로 편제돼 있는 캐논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의 근간이 됐다. 고성능 SPAD(단일광자감지기) 센서와 광자 계수 CT, 나노임프린트 리소그래피에 반도체/디스플레이 노광장치까지 캐논 최첨단 기술 개발의 시작은 언제나 ‘렌즈’와 함께다.

‘きょうせい’(共生·공생)

캐논의 기업 이념이다. ‘혁신’을 통한 ‘함께’를 강조하는 회사답게, 캐논 특허부서는 사내에서 힘이 세기로 유명하다. 지식재산 담당자가 R&D 초기 때부터 해당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 사업을 주도한다. 시제품 조립·생산 등 각 단계마다, 경쟁사 보유 특허부터 조사·분석한다. 그에 따른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부서간 협업을 조율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한 신규 특허 창출까지 자연스레 유도한다. 모두 지식재산 부서의 몫이다.

반면, 국내 대기업 특허팀은 어떤가? 대표적 기피부서다. 딱히 숫자, 즉 매출이 나오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명 ‘돈 먹는 하마’라는 오명에, 특허 담당자들은 늘 주눅과 패배의식에 젖어있다. 그렇다보니, 각 사 지재권팀은 그 어떤 집단보다 전문가 그룹임에도, 타 부문과의 소통이나 공생 없이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갈수록 고립무원이다. 우리 특허맨들, 스스로의 내부 의식개혁이 절실한 이유다.

유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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