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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역사를 잃은 사람들"의 역사는 어디에?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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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에릭 울프(1923-1999)의 〈유럽과 역사를 잃은 사람들〉을 읽고 있다. 1982년에 나온 책인데 2010년에 재판이 나왔다. 노르웨이 인류학자 토마스 에릭센(1962- )은 재판 서문에 “21세기를 위한 책”이란 제목을 붙였다.

“역사를 잃은 사람들”의 역사는 아직도 역사학자보다 인류학자들의 관심 대상이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도 중요한 화두로 자라나 왔다. 울프가 고찰의 시점으로 잡은 1400년 이후 유럽인만을 역사의 주체로 보아 온 역사관이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유럽인의 역사 전개에 객체로만 인식되던 비-유럽인의 주체적 역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역사를 잃은 사람들”. 남양사 고찰에서도 중요한 초점의 하나다. 근대 이전의 역사 기록이 빈약한 데다 근대 들어서는 침략과 정복의 대상이 되어 역사 전개에서 주체적 역할을 인정받지 못한 지역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인류사의 전개에서 맡는 역할이 커지고 있고, 그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에서도 그 주체적 역할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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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 Wolf, 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 (198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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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무기로서 역사학의 진화



어느 사회도 자기 역사를 되새김하는 나름의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이 메커니즘의 진화 과정을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2008)에 이렇게 그렸다.

"역사 서술은 인류 문명 초창기부터 정치적 의미를 가진 활동이었다.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도 과거사의 기억은 주술사의 푸닥거리에 담겨 있었다. 한 부족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푸닥거리를 통해 부족 정체성의 바탕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주술사가 발휘하는 영도력이 제정일치 체제의 근거였다."

문자 발생 후 역사 서술은 지배계층의 교양이 되었다. 정보의 대량 축적이 가능하게 되면서 푸닥거리 단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회가 역사를 공유하며 정체성을 함께하게 되었다. 문자를 향유하던 지배계층은 역사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위상과 소명을 확인했다.

인쇄술 발전으로 정보의 축적만이 아니라 유통까지 대형화된 단계에서 근대역사학이 나타났다. 피지배층까지 문자를 향유하게 되면서 국민 통제수단으로 국민교육이 개발되고 역사교육이 그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역사교육의 내용을 확보하고 담당자를 양성하기 위해 직업적 역사학자들이 대학에 자리 잡고 분과학문으로서 근대역사학을 키워냈다.

근대역사학은 종전보다 정치적 무기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다. 민족과 문명들 사이의 접촉이 늘어난 상황 때문이었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에게 민족의 영광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역사’를 경쟁적으로 개발했고, 이 경쟁에 ‘과학성’이 동원되었다. (10-11쪽)



외부 권력의 지배를 위한 역사의 파괴



울프가 고찰의 기점으로 잡은 1400년은 유럽의 팽창 직전이다. 그러니 그가 살피는 것은 유럽 밖의 사람들이 역사를 잃은 ‘상태’보다 역사를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를 안 가진 사회도 푸닥거리의 형태로든 설화의 형태로든 자기네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밖에서 온 사람들이 가져온 역사보다 정치적 무기로서의 힘이 약한 형태였다. 활과 창이 대포 앞에서 무력한 것처럼 전승되어 온 역사는 유럽인이 가져온 근대역사학 앞에 뭉개져 버렸다.

역사의 파괴는 근대 식민 사업의 한 중요한 부문이었다. 강력한 무기로 피정복민의 행동을 규제하는 한편 강력한 역사관으로 그들의 정체성 의식을 봉쇄한 것이다.

“식민(植民, colonization)”이란 번역어가 정확하지 못한 문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colony”의 어원인 로마의 “colonia”는 문자 그대로 “사람 심기”의 뜻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근대의 식민지는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이주민 중심의 사회를 건설한 경우보다 현지민 사회를 외부 권력이 지배한 경우가 더 많았다.

외부 권력의 현지민 사회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의 파괴가 필요했다. 현지민 사회의 진로를 좌우할 현지 역사의 역할을 부정하고 밖에서 유입된 흐름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적용한 ‘식민사관’도 이런 목적이었다.



인류학의 발전은 학술사상 획기적 현상



초기의 정복자들은 피정복자를 역사를 가지지 않은, 즉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해서도 지배 대상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민족지(民族誌, ethnography)가 형성되었다.

“-logy” 아닌 “-graphy”라는 말은 민족지가 본격적 학문으로 인정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민족’의 의미의 체계적 해명이 아니라 개별적 현상을 묘사하는 작업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발전에 따라 18세기 말부터는 민족학(ethnology)이란 말이 쓰이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인류학(anthropology)의 발전은 진화론의 출현에 자극받은 것이었다. 민족지나 민족학이 고찰해 온 대상을 보다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의욕이 크게 일어났다. 초기에는 자연과학에 주로 의지하는 형질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이 위주였으나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문화인류학과 사회인류학이 주류가 되었다.

20세기 후반 인류학의 폭발적 발전은 학술의 역사에서 획기적 현상이다. 19세기 학술의 분과화(分科化)를 재조정하는 방향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연구 대상의 범위에 따라 설정되는 다른 학술 분야와 달리 인류학은 연구 방법의 종합성으로 판별되는 것이다. 인류학이 “인문학 중 가장 과학적인 분야이며 사회과학 중 가장 인문적인 분야”라는 울프의 설명도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근년에는 ‘역사인류학(historical anthropology)’이란 영역을 많이 이야기한다.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연구방법을 통한 역사 연구가 활발하게 펼쳐지기 시작했으나 아직 역사학계에서 제도화되지 못한 단계로 볼 수 있다. 내가 남양사 정리를 위해 참고하는 연구서 대부분이 이 영역에서 나온 것이다.



생산양식과 정치체제 사이의 관계는?



〈유럽과 역사를 잃은 사람들〉을 역사서로 보기에는 사실 파악이 무척 허술하다. 이 책의 가치는 사실을 밝히는 데보다 사실을 바라보는 방법을 점검하는 데 있다. 울프 자신도 1997년 재판 서문에서 책의 목적이 역사의 서술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상호 의존 관계를 통해 형상화”할 필요를 밝히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상호 작용과 상호 의존)를 보는 시각으로 울프는 ‘생산양식’을 제시한다. 친족 관계(kin-ordered), 조공 관계(tributary)와 자본주의의 세 가지다. 친족 관계 생산양식은 외부의 압력이 약한 상태에서 작동한다. 조공 관계는 외부의 힘이 강할 때 강요된다. 외부의 힘이 더 강해지면 내부의 생산구조를 바꾸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립한다.

울프의 생산양식론이 마르크시즘과 다른 점은 생산양식의 필연적 진화 과정을 부정하는 데 있다. 외부의 힘이 약해지면 조공 관계에서 친족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책이 나온 40년 전에 비해 불확실성이 늘어난 지금 상황에서 음미할 필요가 더 커진 관점이다.

생산양식과 직결되는 문제가 정치체제다.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 개념은 조공 관계 생산양식을 발판으로 이뤄진 것이다. 정치적 무기로서 역사의 역할은 국가를 배경으로 자라난 것이다. 지금 세계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강화에 따라 국가의 역할이 퇴화하고 있다. 다음 단계에서 세계는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 갈까?

역사의 흐름을 무한한 진보의 길로 보는 ‘진보사관’이 근대세계에 유행했으나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힘을 잃었다. 그렇다고 끝없는 순환의 과정으로 보는 ‘순환사관’이 힘을 되찾을 것 같지도 않다. 울프의 책이 이 문제에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지만, 이 문제와 관련된 생각의 범위를 넓혀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에릭센이 “21세기를 위한 책”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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