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 세계 1위의 비밀
린홍원 지음|허유영 옮김|생각의 힘|496쪽|3만5800원
대만 경제일보의 린홍원 기자는 1990년 중반 대만 반도체 기업 TSMC에 갔다가 로비 데스크의 방문객 출입관리대장과 씨름을 벌였다. 그는 취재를 하러 기업에 갈 때마다 방문객 출입관리대장을 쓰면서 경쟁 매체 기자가 다녀갔는지 보기 위해 앞장을 슬쩍 넘겨 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TSMC의 대장엔 앞장을 넘겨볼 수 없도록 집게가 꽂혀 있었고, 맨손으로는 집게가 움직이지도 않았다. TSMC를 방문한 고객사를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분 확인을 위해 로비 데스크 직원에게 유효 기간이 지난 운전면허증을 냈다가 거절을 당한 경험도 TSMC에서만 겪었다.
TSMC의 성공 비결은 이 집게와 운전면허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로비를 통과하는 순간, TSMC의 고객사는 짜증보다는 안도를 느낄 것이다. 로비 직원이 세심하게 보안에 신경 쓰도록 이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면 연구개발(R&D) 센터나 공장의 보안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TSMC는 이런 식으로 고객에게 충성도를 보여주면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진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가 됐다. 30년간 대만 반도체 업계, 그중에서도 TSMC를 집중적으로 취재해온 저자는TSMC의 경쟁력을 논할 때 반도체 기술이나 공정만이 아니라 이런 소프트파워를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TSMC 임직원은 물론 경쟁사, 고객사, 협력사를 취재한 기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고객을 위해서라면 짚을 지고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어야 한다"는 회사의 원칙이 TSMC의 성공 비결이다. 사진은 지난 6월 중국 난징에서 열린 국제 반도체 박람회의 TSMC 전시관을 찾은 관람객들. /게티이미지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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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에 속하는 반도체 생산에 소프트 파워가 중요한 것은 TSMC가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상 디자이너가 종이에 스케치를 그리고, 옷감, 옷깃의 모양, 소매 길이 등을 정해서 의류 공장에 가져다주면 공장에서는 이 주문에 따라 옷을 만들어준다. 마찬가지로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지 않고 반도체 설계만 하는 엔비디아나 퀄컴 같은 회사들이 디자이너고, 이들로부터 설계도를 받아 주문대로 만들어주는 공장이 TSMC 같은 파운드리다. 고객사로부터 주문이 끊이지 않아야 살아날 수 있는 파운드리는 전형적인 을(乙)이다. TSMC는 ‘을 중의 을’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갑 같은 을’이 됐다. 고객사를 만족시키기 위해 ‘서비스업 같은 제조업을 한다’는 게 이 회사의 이념이다.
1999년 대만을 강타한 ‘9·21 대지진’ 때 TSMC의 주요 공장이 있는 신주과학단지 정문 앞에는 이곳을 들어가려는 차로 길이 막혔다. 다른 기업이었다면 인명 피해를 걱정해서라도 당분간은 공장 출입을 막았겠지만 TSMC 임직원들은 공장 복구부터 하러 갔다. 당시 복구에는 적어도 한 달 이상이 걸리고 고객사들이 다 빠져나갈 것이란 전망이 나왔지만, 공장은 2주 만에 정상 가동이 됐다. 지진이 일어나자 임직원들이 공장에 달려간 광경을 보고 TSMC를 떠나는 고객사는 없었다.
올 2분기 전 세계 파운드리 점유율은 TSMC 62.3%, 삼성전자 11.5%이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첨단 공정에서 TSMC의 점유율은 90%까지 올라간다. 한국 독자라면 TSMC와 삼성전자의 점유율 격차가 왜 점점 더 벌어지는지, 삼성이 TSMC와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전작이 ‘거물 기업 삼성’일 정도로 한국 반도체 업계에도 관심이 많은 저자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서 TSMC를 따라잡기 힘들 것이란 전망을 조심스레 내놓는다.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기업들 입장에서 TSMC는 경쟁자가 아니라 조력자에 가깝다. 반면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컴퓨터나 가전제품을 팔면서 파운드리도 한다. 삼성전자의 경쟁사가 자신의 반도체 설계도를 믿고 맡기기 어렵다. 고객의 신뢰를 얻기 힘들단 게 가장 큰 문제고, 반도체 기술이나 공정의 문제는 그다음이란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나 평소 반도체에 관심이 많은 독자가 아니라면 생소할 만한 용어가 종종 등장하지만, 직접 보고 들은 일화 위주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 세계 반도체 지형 변화 과정과 TSMC가 갖고 있는 독특한 승계·보상 방식이나 회의 문화 등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에 반도체 입문서나 경영서로도 적합하다. 저자가 대만 기자로서 TSMC에 갖는 자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TSMC와 대만 기술 업계가 갖고 있는 문제도 엿볼 수 있다. 한국 반도체 업계에도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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